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며칠 전부터 간청해왔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니메이션 한 편을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본인은 이미 다 봤지만,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한 뒤, 주말이 시작되던 어느 날 아들과 나란히 앉아 그 프로그램을 찾아 재생했다. 러닝타임을 확인하며 한숨이 나왔지만, 아들의 요청인 만큼 겉으로는 흥미로운 척 TV 앞에 앉았다.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놀랄 만큼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들이 굳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였다.
이 애니메이션은 가상의 3인조 K팝 걸그룹 ‘헌트릭스’가 무대 밖에서 악귀를 사냥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이야기다. 한국 무속신앙과 K팝 스타라는 두 정체성을 결합한 파격적인 설정은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당의 신칼,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검, 도깨비와 물귀신 등 한국 전통문화가 곳곳에 살아 있고, 주인공들이 지치면 국밥을 먹거나 한의원을 찾는 모습, 서울타워와 낙산공원을 배경으로 싸우는 장면, 휴지를 깔고 수저를 놓는 식당 예절까지 한국인의 일상이 정교하게 녹아들었다.
이야기의 뼈대는 익숙하다. 결핍을 가진 주인공들이 고난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건, 귀신을 단순한 악으로 다루지 않는 점이다. 서양식 퇴마물이 악령을 쫓는 데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한국 무속의 정서를 따른다. 귀신은 풀리지 못한 이야기와 감정을 품은 존재이고, 무당은 그들을 설득해 위로하며 떠나보낸다. 그 과정이 이야기의 정서적 깊이를 더하고, ‘영웅’이라는 개념에도 섬세함을 부여한다.
놀랍게도 이 메시지는 전 세계 시청자에게 통했다. 지난 6월 공개된 이 작품은 개봉 직후 40개국 넷플릭스 1위를 휩쓸었고, OST는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 1위에 오르며 현실 음악 시장을 흔들었다. 가상의 K팝 그룹이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오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기자가 이 작품에 끌린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출발점이 ‘이해받지 못한 존재’에 닿아 있어서다.
특히 한인 2~3세들에겐 이 작품이 한국계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확립하는 기회가 된다. 누가 알려주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서 보고 듣고 즐기며 한국이라는 뿌리를 더듬는다. 실제로 아들은 작품 속 남산타워와 낙산공원을 알아보고, 작년 한국 방문 때 직접 다녀온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연결된 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더욱 의미 있는 건, 이 작품의 제작에 한국계 2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단지 문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창작하며 세계 시장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변화다. 이제는 누군가 만들어준 콘텐츠를 따라가는 세대가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쓰고 문화를 주도하는 세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 한국계 여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서 있다는 사실 또한 인상 깊다. 늘 조연이거나 주변인으로 묘사되던 아시안이, 이 작품에선 세계를 구하는 서사의 중심을 당당히 이끌고 있다.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미국 젊은 세대가 한국어가 섞인 노래를 따라 부르고, K팝을 넘어 한국 문화 전반에 열광하는 시대가 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 흐름 속에서, 한인 차세대가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마주하고, 세상에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이 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 바깥에서 그보다 더 큰 서사가 조용히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
황의경 사회부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