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기사, 제목 장식했던 ‘독한 용어들’ 당분간 자제
갈색폭격기 대공습. 한국이 배출한 최고 축구스타 차범근이 독일 프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79년대말∼80년대말) 그의 ‘무시무시한 애칭’때문에 신문 스포츠면에는 이같은 ‘무시무시한 제목’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90년대 후반 일본 프로야구를 주름잡은 선동열에게는 오돌토돌한 얼굴때문에 얻은 멍게라는 애칭도 있었지만 일본 진출뒤로는 한국야구의 자존심을 고려한 탓인지 언론에서 무등산폭격기란 애칭이 훨씬 더 애용됐다. 그러나보니 적어도 스포츠기사 제목으로만 보면 일본 열도는 일년에도 수십차례씩 무등산폭격기로부터 유린당해야 했다.
사실 스포츠 경기는 또다른 형태의 전쟁이다. 야구는 협살·병살 등 용어 자체부터 사뭇 전투적이다. 선수나 구단의 애칭에서도 온갖 섬칫한 별명들이 수두룩하다.
검은 표범·흑진주·호랑이 따위는 그야말로 애교 수준이고 파괴자·터미네이터·지옥의 사자·흡혈귀 등 살기등등한 애칭들은 예사고 핵폭탄·중성자탄·핵미사일 등 대량 살상무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스포츠판이 그렇다보니 스포츠기사 역시 전황보고 비슷하게 살벌해질 때가 많다. 파괴하고 침몰시키는가 하면 붕괴되고 격추되고 최후의 비수를 꽂아대고….
지구촌을 충격과 비탄으로 몰아넣은 테러참사는 일상화된 ‘스포츠 수사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포츠 기사마저 소름끼치는 용어로 분칠하지 말자는 의지가 이심전심 퍼진 것이다.
박찬호(LA 다저스)가 17일 샌디에고 파드레스전에서 구원등판했다가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한 채 4실점한 기사를 다루면서 본보가 ‘소방’ ‘방화’ 등 불과 관련된 용어를 피하고 같은날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9회말 1이닝동안 깔끔하게 마무리한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대해서도 종전과 같이 잠수함피칭·어뢰투와 같은 전투적 용어를 삭제한 것 역시 이같은 분위기를 감안한 것이었다. 주류 언론들도 대부분 17일의 메이저리그 재개 소식을 전하면서 각 스테디엄에서 펼쳐진 테러희생자 애도분위기와 응징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승패 자체는 사실 위주로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점잖은 스포츠’가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국가적 재난을 처한 현재 당장 잔치티를 낼 형편은 못되더라도 스포츠는 되레 침울한 분위기에 웃음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메이저리그·NFL 등이 참사직후 경기취소를 둘러싼 논쟁을 벌일 당시 스포츠마저 침울해지면 안된다며 경기강행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LA 타임스지도 지난 15일자에서 테러참사 영향으로 스포츠기사들도 보다 덜 자극적인 용어들로 채워지고 있다며 이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스포츠 기사와 제목에서 사라진 자못 소름끼치는 단어들이 되돌아오는 속도는 곧 미국 사회의 충격회복 속도와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박찬호와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가 경기에서 맞붙을 경우 한-일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호들갑 보도태도만큼은 이번 ‘자숙기간’을 통해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