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부터 30년간 해바라기 유치원 운영
1989년 영국 백과사전 국제시인 인명사전에 등재
시집 7권·수필집 3권·장편소설 2권…수많은 찬송가 작사도
시인에게는 절망 없어$어려운 삶의 고비가 복받은 인생
수십년간 뉴욕한인사회에 시심을 불어넣어 정신적으로 풍요로이,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인들의 삶을 위해 애써온 곽상희 시인, 그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는 영혼의 목소리
“옛날보다 더 바쁘다. 1984년부터 창작 클리닉을 열어 시를 가르치는데 현재 기독교 문학회와 합해 50명 정도를 개인과 단체위주로 대하고 있다. 현재 매달 한국의 문학계의 유명시인들과 평론가를 합해 700명 정도의 대상에게 (물론 그 중에는 목사님들 시애호가등이 많음) 2014년부터 <곽상희 서신>을 이메일서신을 보내고 있다. 시작한 동기는 단순히 회원들이 좀더 시세계를 가깝게 접하고 시작업에 도움을 주고 이민 사회에 한국의 서정을 펴려는 그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자연히 내용과 대상이 확대되었다고.
그는 이제 시를 너무 사랑하고 시에 대한 열정이 간절하기에 부끄럼도 자존심도 없어졌다고. ”그냥 시의 가슴의 문을 두드리는 누가 말하듯 ‘시의 전도사’“라고. 또 다들 바쁘다보니 이메일로 시를 보고 가르치기도 한다. 제자들이 뉴욕한국문인협회나 한국 문단에 데뷔하여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보람있고 기쁘다.”
근황을 전하는 시인 곽상희는 제자들을 많이 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현대종합예술 아카데미, 사랑의 쉼터 카운슬링 센터, 퀸즈 성인대학 및 신학대학, 뉴욕퀸즈대학, 미국사회 커뮤니티 모임 등에서 한영시 낭송과 강연등을 통해 기뻤던 것은 한글 음의 소리가 음악 같고 참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다는 그들의 반응이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우리의 한글은 깊고 섬세하여 영혼의 깊은 곳곳을 들어낼 수 있어 시 쓰기에 참으로 알맞으나 반면에 시 쓰기가 쉬우면서도 조심스럽고 힘든 것이 한글로 시쓰기다라고.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주한인언론에 교육, 사회, 문화, 문학, 시사칼럼을 집필하고 미 유수 문학지에 영시를 발표했다. 1984년 5월이후 뉴욕문학인들과 문학애호가들을 위한 정규적 문학 모임을 개최했고 문화원에서도 문학과 문화행사를 개최, 국제시인들과도 교류 했다.
▲뉴욕한인사회 최초 해바라기유치원 경영
곽상희는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고 해방후 한국으로 다시 와서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후쿠이깽 지역에서 자랐는데 눈이 무척 많이 오는 곳이라 한다.
“지금도 눈이 오면 좋다. 어려서 몸이 자주 아팠다. 한 1년은 집에서 병치료를 받으며 자연히 책을 많이 읽었고 인생에 대한 사고를 많이 했다. 문인이 된 것은 운명적이다.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 가려고 비자까지 나왔는데....미국으로 오게되어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며 감사한다고.
1963년 도미한 그는 오하이오대와 뱅크 스트리트 교육대학원 아동교육학을 전공했고 1978년과 1980년 현대문학에 시 ‘허드슨강의 노을’을 추천받아 한국문단에 등단했다.
“미국에서 아동교육학을 전공하여 워낙 어린이를 좋아하여 해바라기 국제아동교육센터를 1978년에 열어 2008년까지 30년간 운영했다.”
뉴욕한인사회에 최초로 생긴 데이케어 센터는 맞벌이 부부의 구세주가 되었다. 전문 자격증을 지닌 교사들이 종일 아이를 돌봐주었다. 당시 해바라기유치원은 플러싱과 엘머스트 두 군데 문을 열고 150명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원생들은 뉴욕시청에 가서 태극기를 들고 한국 노래를 들려주는 등 한국문화 사절 역할도 했다.
곽상희는 청소년들에게 자신감과 정체감을 심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90년도에 아시안아메리칸 에디케이션 센터 주최로 현역 공립학교 한인 선생들 시인들의 도움을 받아 뉴욕을 비롯 미동부 지역 대상으로 청소년글짓기대회를 10년간 개최, 수상자에게는 장학금을 주었다. 한국어를 잘 모르는 아이는 영어로 쓰게 했다. 그것으로 인해 한국에서 갖 온 학생들의 자긍심을 길러 주었고 거리에서 방황하던 어는 고등학생은 자신감을 얻어 학교로 돌아가 기쁨으로 공부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기쁨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 자신 미주지역, 캐나다, 스페인, 중국, 영국, 비엔나등에서 개인으로 또 뉴욕 거주 시인들과 함께 시 낭송, 패널리스트와 강연자로 한국문학과 문화를 타 문화권에도 소개했다.
1990년부터 이민사회 여성들의 모임을 위한 문학강연과 세인트 존스, 컬럼비아 대학, 병원 등에서 개최하는 문학서클에서 강연(한,영)과 시낭송을 했다. 문화원에서 1986년 강신성 화백과의 시화전, 개인파스텔 그림전, 2002년 작곡가 김동진의 마지막 작곡인 ‘만남’ (일명 통일의 노래)의 가사를 지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시는 영혼의 자유, 삶과의 상관관계성에서 시인은 시 앞에 정직 진실하고 겸손해야
곽상희만큼 세계적으로 큰 상을 많이 받은 이도 없다. 국내에서의 소설상, 1989년 국제시인 미도서시인상, 1997년 제1회 박남수 시인 대상, 2005년 제1회 미주시의회 대상, 1994년 스페인 올림포에트리( Olympoetry) 시인 피선, 1998년 영국 국제여류 시인상, 2007년 국제계관시인연합 (UPLI) 계관시인 선정 등 여러 상을 받았지만 그 중 1989년 영국 백과사전 국제시인 인명사전에 등재된 일은 뜻 깊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를 열심히 썼고 인정받았으며 후세의 한글교육에도 온갖 열성을 다 바쳤지만 정작 그는 문학 모임에서 그 흔한 회장 자리 한번 한 적이 없다.
“전 태생적으로 뭘 머리에 올리는 것이 싫어요. 제 인생관과 철학관도 그렇고, 그것은 원하는 사람의 몫이고 전 그저 순수한 시인으로 교육자로 제가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하는 거에요. 그것도 시간이 모자라는 데..... 나는 시인이고 싶을 뿐이지요. 시인은 자유를 위해 시를 쓰는데 회장 말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후훗...”
비록 회장은 안하지만 소리 없이 할 일은 다 한다. 문제가 생기면 말로서, 편지로 양쪽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해결해 준다. 원로 선배문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의 말로는 시인들 문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곽상희는 그동안 시집 7권, 수필집 3권, 장편소설 2권. 그 외 수많은 찬송가사 작사를 했다. 시집에는 ‘바다 건너 목관악’(1981),‘우리 지금 아무도 노래하지 않네(1987), ’봄도 아닌 겨울도 아닌 날에‘(1990), ‘길은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3), ‘끝나지 않은 하루’(1996), ‘오직 사랑함으로’ (신앙시집, 2008), ‘고통이여 너를 안는다’ (2012)가 있다.
국제 여류시인들과 공동시집,1982,1986“ 장편 소설 “Two faces, 2013”, 수필집 ‘그 하늘과 바람 흙을 꿈꾸며’, ‘그대의 삶 그의 기쁨을 위하여’, ‘아름다운 상속자’, 장편소설 ‘뉴욕 갈매기’와 ‘바람의 얼굴’ 이 있다. 그는 <바람의 얼굴>을 그 속에는 조국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근대역사 그리고 초기 이민사회의 굴곡진 고통과 사랑을 펼친 영혼의 서사시라고 말한다.
곽상회의 시심 및 서정은 아들들이 물려받아 세째는 시집을 출판하려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미군 군목이 되었다. 지금 6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지만 그의 시심과 모습은 여전히 문학소녀처럼 수줍고 여리기만 하다.
곽상희의 시를 두고 많은 국내저명인사들의 평과 해설 등이 있으나 그의 시의 내용과 형태를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기독 휴머니즘을 연계하여 긍정적인 메타포에 그러나 쉬운 언어의 표현으로 경도되어 있다. 쉬운 언어로 그러나 깊은 우물과 같이 뜻이 깊어 감동을 준다는 평을 받는다. “저는 시를 인생과의 상관관계로 가는 두 선의 레일로 보기 때문에 시를 씀으로 변화되고 성숙되는 그 인품을 제자들에게 말해요. 시를 씀으로 영혼이 자유 되는 행복, 시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고 무엇보다 좋은 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정직과 진실의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니까요. 시는 결코 택크닉만이 아니지요.”
▲조국은 우리의 영혼의 신발과 옷
“미국 온 지 50년이 넘었는데 초기 이민사회와 지금의 한인사회를 보면 참으로 감격스럽다. 희망하고 꿈꾸던 일들이 지금 여러 면에서 성취되고 있다. 자랑스럽고 흐뭇하다. 무엇보다도조국 안에서보다 더 이상적인 후세교육에 정신을 모으고 있다는 점이 즐겁고...뉴욕에서 이민생활 하면서 생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시를 쓰려는 마음, 열심히 시를 쓰는 사람들, 이들은 명예, 권력,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래야 감동 있는 시를 쓴다. 말하자면 시를 쓰면서 인격과 그의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이다”
반세기 이상을 미국에 산 그는 조국애도 남다르다. 그에게 조국은 무엇일까?
“조국애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영혼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의 신발이며 옷이다. 그 두 가지 없이 거리에 나가보라, 아, 생각만 해도 가슴 저리고 아픈 일이다. 나는 베트남이 없어졌을 때 한 청년이 조국애의 시를 가슴에 품고 바다를 뛰어든 기사를 읽고 통곡하고 울었다, 나의 제2 시집 ”우리 지금은 아무도 노래하지 않네‘는 그 시절 외국에서 보고 동참한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헌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곽상희는 ‘무엇보다도 시인은 선각자이며 예언자라는 나의 시 정신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후배가 많이 있었으면 한다. 이민 시인들은 그런 시 정신을 가지지 않고는 이민사회에서 공감 받고 감동의 힘을 주는 글을 쓰기 힘들다.’고 일러준다.
그는 자신이 건너온 난해하고 어려운 삶의 고비 고비가 복 받은 인생이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아이들과 같이 있었고 좋아하는 시를 평생 쓰고 있다. 해바라기 유치원을 거쳐간 아이들이 현재 40대 전후로 모두 성공한 사회인이다. 청저하게 인성교육을 위해 어리지만 창조관과 경애심을 그때 숙제를 내어주며 좋은 습관을 길렀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부모들을 만나면 반갑다. 인사하는데 때로는 아이의 이름과 그 모습까지 기억해낸다. ”애들 이야기를 하면서 만면 가득 웃음이 번지는 그다.
▲시는 내 삶, 신앙, 웃음, 눈물
“현재 너무 행복하다. 시는 내 삶이며 신앙, 아니 웃음이며 눈물이다. 시를 쓰는 한 은퇴도 없다.”는 그는 “인생의 어려움이 오히려 시인에게는 풍성하고 깊게 사유하는 시간을 준다. 시인에게는 절망이 없다. 꿈꾸고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고 말한다,
그는 시를 위해 그림을 배워 시화전을 할 때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해요, 그것을 연민의 가슴으로 보듬고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고 나는 본다.”는 그는 “사실 시를 위해 그의 모두를 바쳤다”고 환한 표정으로 웃는 그, 그야말로 참시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긴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기자의 가슴이 뭉클했다. “시인은 무엇보다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가슴과 눈을 가져야 한다는 시인 곽상희, 영원한 사랑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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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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