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평양에 온 소련군 대위 김성주가 일제시대 ‘장백산의 호랑이’로 명성을 떨친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배경을 상세히 기술한 미국 군사정보국 기밀해제문서가 발견됐다.
미 극동사령부 군사정보국(G-2)이 1952년 7월31일 작성한 기밀 보고서 ‘인민군의 역사’(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는 북한 ‘주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개요’ 부분에서 김일성에 대해 “북한 수상이자 북한군총사령관인 김일성은 북한의 최고 공산당이자 ‘가짜’(Imposter)이다”며 “모든 ‘코리안들’(Koreans)이 숭배하는 진짜 김일성은 1885년 태생으로 만일 그가 현재(1952년 7월31일)까지 살아 있었다면 오늘 나이 67세가 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진짜 김일성 장군은 “경상남도에 살았던 ‘김춘한’(Kim Chun Han)의 차남이었고 매우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후에 (일본)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졸업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게릴라’(Guerrilla) 대장이 됐다”며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할 당시 모두 (일본군) 대령 또는 장군이었던 그의 군사학교 동기들에 따르면 그는 전술가로서 탁월한 능력
을 발휘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코리아’에 있던 일본군들에 대한 그의 습격들은 전설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결국 만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곳에서도 (습격에) 계속 성공을 거둬 일본군에게 ‘장백산의 호랑이’(The Tiger of Chang Pek San)로 알려지게 됐다”며 “1935년 봄 만주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한국 역사에 전설인물로 알려지고 있는 김일성 장군이 그와 함께 일본군사관학교를 다녔고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실제 인물로 확인됐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가짜 김일성
보고서는 이어 “현재(1952년 7월31일) 김일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성주는 1910년 4월 ‘김형진’(Kim Hung Jin)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1918년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잡혀 투옥된 후 결국 옥사했고 김(김성주)과 2명 동생들은 만주로 도피했다”고 기술했다. 또 김성주가 만주 지린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을 하지는 않았고 1929년 학교를 중퇴하고 공산당에 가입해 동만주 청년동맹위원회의 지린 지역 서기가 됐으며 바로 그 시기에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김성주는 1930년대 초에 잠시 ‘우이쳉’(Wu I-Cheng)의 (중공군) 부대에 소속됐었고 당시 동만주에는 코리안 ‘게릴라’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김(성주)은 매우 능력 있는 ‘게릴라’였음이 분명하며 그로 인해 진짜 김일성의 주목을 받게 됐다”고 밝혀 김성주와 김일성 장군이 한때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보고서는 김성주의 구체적인 ‘게릴라’ 활동에 대해 “젊은 김(김성주)은 북만주군과 동맹을 맺는 일에 관계했으며 1936년에 항일연합군이 설립됐다. 이 ‘게릴라’ 군대의 3군단과 6군단이 ‘코리안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 1938년 6군단의 사령관이 돼 일본군에 쫓겨 소련 지역으로 도주한 1939년까지 매우 활발한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그러나 김성주가 소련으로 도피한 뒤 “소련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며 “그가 소련 군사학교에 들어가 대위가 됐고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에 실제 참가해 훈장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성주의 둔갑
보고서는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내역에 대해 “김성주는 1945년 8월 러시아인들과 함께 소련군 육군대위로 북한에 돌아왔다.”며 “그는 북한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던 ‘비공산당’(Non-Communist) 지도자이자 능력 있는 민족주의자 ‘조만식’(Cho Man Sik)에게 교제를 구해 비밀리에 자신이 열렬한 민족주의자이고 ‘코리아’에 대한 공산당의 계획 일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꾸며댔다”고 전했다.보고서는 또 “이에 속아 넘어간 조(만식)는 1945년 10월3일 평양에서 열린 해방 축전에서 김성주를 열렬한 ‘코리안’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자로 평하고 김일성으로 소개했다”며 “조(만식)의 명성은 진짜 김일성이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두루 생각하지 않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검(성주)이 열성적인 환영을 받는 것을 보장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까지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1945년 10월14일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성주를 처음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고 그 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행세를 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보고서는 이어 “김(성주)은 곧바로 높은 인기를 얻었고 같은 달 소련의 전격적 후원을 업어 지역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당의 대표직과 ‘코리안 공산당’의 대표직을 이름뿐만의 대표인 박헌영으로부터 획득했다”며 “박헌영은 남한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로 ‘코리안’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찬밥신세가 된 것과 (가짜 김일성) 마음대로 이용된 후 내버려져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고서에는 김성주가 장악한 ‘코리안 공산당’이 1946년 ‘혐의들을 꾸며내’(trumped up charges) 조만식을 체포했다는 첩보가 담겨있다.
한편 보고서는 김성주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비공산당들은 그를 행정능력이 떨어지고 외국어 능력과 교육이 부족한 ‘무작한 사람’(roughneck)인 반면 능력 있고 ‘무자비한’(ruthless) ‘게릴라‘ 대장으로 평했다고 기록했다.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에 지난 14일 태양절을 맞아 평양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사진=연합통신>
■ 조선민주당 당수로 반탁운동 전개
조만식독립운동가
본관 창녕, 호 고당.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했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끼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돼 활약했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했으나 거부했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했다. 그 후 6.25 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됐다. 1991년 유발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두산백과사전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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