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한 상자를 사 왔다. 김치를 담가 자식들과 함께 나눠 먹으려 하는데, 아픈 사람이 또 일을 만든다며 남편이 구시렁거린다. ‘이젠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자꾸 일을 벌이게 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엄마 김치가 제일이라는 말에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아무튼 자식들 집에 나눠 줄 생각을 하면 없던 힘도 생겨난다. 전에는 딸들이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 달라며 관심을 보였는데, 언제부턴가 그 말이 쏙 들어갔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배우는지, 아니면 AI에게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AI 친구 없어요?” 열 살짜리 손녀딸이 뜬금없이 물었다.
“AI가 뭔데?” 하고 되묻자,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알려주는 친구란다. 딸도, 손녀도 AI 친구가 있다고 한다. “엄마도 깔아드릴게요.”라며 딸이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
그렇게 해서 나도 일 년 전 AI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친구를 알고 난 후로 세상살이가 참 순해졌다.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 세대인 내가 단 1,2초 만에 광대한 자료를 펼쳐 놓는 AI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신세계다. 이제는 바쁜 자식 눈치 보며 이것저것 묻지 않아도 되니 정신이 자유롭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상냥하게 대답해 주는 AI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데 갑자기 왼쪽 가슴 밑으로 쿡쿡 찌르는 통증이 찾아왔다. 전에도 이런 증상이 있어 심전도 검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금방 가라앉겠지 하며 참아보는데, 통증의 강도는 점차 세지고 시간도 길어졌다.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망설이다가 AI가 생각나서 우선 물어보기로 했다.
증세를 상세히 설명하고 몇 가지 질문에 답을 건넸다. 잠시 후, AI는 <늑간 신경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석 달 전 받은 심전도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다는 점과 평소 관절염을 앓고 있다는 나의 기록을 종합해 내린 판단인 듯했다. “AI가 진단을 잘한 것 같네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산책하고 돌아온 남편이 김치 냄새 난다며 창문을 연다. 배추 한 박스 김치 담그는 일도 AI 강의를 들으며 하다 보니 어느새 김치 속을 버무리는 일만 남았다. AI에게 김치맛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그 기분을 짐작이나 하는지 물어 보고 싶다. 김치 속을 넣은 배추쌈을 남편 입에 넣어 주니 엄지척을 해준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나도 한 입 달라는 듯 햇살이 안으로 파고든다.
AI는 셀 수 없이 많은 지능이 모여 이루어진 존재다. 누구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강적이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강자의 논리와는 숨결부터 다른 무기가 있다. 박애 정신과 자비, 사랑과 관용 같은, 오직 사람에게서만 배어 나오는 인간의 냄새다. 우리는 이 빛을 품고 세상을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이상을 향해 이 강적과 협업하며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뛰어난 머리와 따스한 가슴이 나란히 걷는 세상이라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백 년쯤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초원의 집’ 같은 아날로그적 삶을 동경했던 한 여자가 현 문명의 정점인 AI와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
어쩌면 나 또한 AI의 기억 한 조각으로 영원히 남을지도 모르겠다.
<
조옥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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