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세대’인 4050은 속을 들여다보면 남모르는 고민이 엄청나게 많다. 뒤늦게 한국서 온 이민구(40)씨는 그래도 한국보다는 나은 자녀들의 교육환경에서 위로와 자신감을 얻고 있다. <서준영 기자>
“부담은 크고 갈등은 깊다”
40대 중반~50대 중반이면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기반도 어느 정도 잡았고,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남을 이해하는 눈도 깊어졌다. 밖에서 보기엔 다소 여유가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세대, 뛰지도 못하고, 웅크리지도 못하는 ‘샌드위치 세대’가 바로 우리”라는 자조가 4050, 그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남이 그린 초상화와 그 스스로 그려낸 자화상간에는 이처럼 단층이 깊다.
죽어라 일해도 밑빠진 독
자녀-노부모 뒷바라지
노후대책은 보랏빛 환상
남의일 아닌‘중년돌연사’
코리안 베이비부머 세대인 이들은 누가 뭐래도 한인 이민사회의 주축이다. 집에서는 이들만 바라보는 가족이 있다. 직장에 나가면 최소 중간 관리자 이상은 되어 있다. 숨막히던 비즈니스 운영도 이제 한숨을 돌린 사람이 많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충격으로 다가서는 40대 돌연사 소식에 죽어라고 벌어 오지만 밑 빠진 독처럼 드는 돈, 노후 대책은 보랏빛 환상에 불과하다. 10~20년을 살아도 영어는 늘지 않고, 미국문화는 여전히 낯설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인생을 살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직장에서는 젊은 친구들의 눈치까지 보인다. 어느 인생이 고민 없는 인생이 있으랴만 속을 들여다 보면 미국에 뿌리를 옮겨 사는 코리안 아메리칸 4050은 고민과 갈등 투성이의 세대이기도 하다.
오렌지카운티 가정상담소 2005년 연령별 통계에 따르면 상담한인 중 50대가 32.1%, 40대가 31.5%. 이들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그만큼 상담소 문을 두드릴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김선영 소장은 “한인 4050 세대의 고민은 부부와 자녀문제를 비롯해 건강, 재정, 불안한 노후대책, 노부모 봉양 등으로 모아진다”며 “더 큰 문제는 이같은 고민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라고 전한다.
사춘기가 10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만철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 세대가 되면 특히 남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저하되는 반면, 가족부양 등 현실적 책임부담은 오히려 커지면서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흔들려 ‘자아상실감’에 빠지기도 한다”고 전한다.
‘샌드위치 세대’ 4050,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시리즈를 4회에 게재한다.
4050 세대 이혁 변호사는 서류더미에 파묻혀 스트레스가 적지 않지만 친구들과의 모임과 운동 등을 통해 이를 해소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새 꿈’은 너무 늦고… 살 날은 길고…
40대 중반~50대 중반의 4050 세대는 고민이 많다. 한인 상담기관 등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코리안 아메리칸 4050의 고민 10가지는 대략 부부관계, 자녀문제, 건강, 안정된 생업이나 직장, 재정,불안한 노후대책, 노부모 봉양, 전업, 고독, 직장내 갈등 등의 순이다. 그러나 이같은 고민의 출구는 마땅치 않다.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일에 매달려온 그들은 이제 이민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 세대로 인생의 절정기를 맞고 있지만 남모를 고민과 부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갈등은 그 진폭이 크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죽어라 노력해 왔지만 자녀의 대학 학비를 걱정해야 하고, 대책없는 노후생활을 생각하면 답답함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 예전과 다른 건강,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자신감, 새로운 변화요구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LA시 노인국의 4050 세대 헬렌 이씨. 46세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미국은 한국보다는 4050 세대에게도 기회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이민사회 이끄는‘축’으로 인생 절정기 맞고 있지만
부부-부모-건강-외로움-노후문제 등 첩첩‘벽 절감’
그나마 자녀교육 위안… 전문가 “자신감 회복 중요”
전기기술자로 오랫동안 주 정부 관련 일을 해 온 LA 김모(51)씨. 나이 50을 넘으면서 뭔가 자신의 인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지만 딱히 할만한 일도 없고, 자신도 없어 미적미적 시간만 보내다 보니 스트레스만 쌓여 요즘 수면장애로 고생하고 있다.
가든그로브의 장모(53)씨는 지난해 가을 우연히 병원을 찾았다가 신장에 혹이 생겼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혹시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비슷한 또래들이 일찍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해 온 터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단순 물혹임이 밝혀졌지만 장씨는 요즘 몸에 작은 이상신호만 느껴도 신경이 칼날처럼 곤두서 병원 두 곳을 동시에 찾는다.
4050 세대는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은퇴할 나이가 됐다면 더이상 미련이 없을 것이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의욕과 꿈을 키울 수 있을텐데 반전의 계기나 돌파구를 찾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정리하거나 다른 업종으로 비즈니스를 전환하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해 보지만 무엇보다 자신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새로운 꿈을 갖고 도전한 이민이 오히려 가정을 망쳐 놓은 경우도 있다. 7년 전 이민온 최모(51)씨는 요즘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듯한 절망에 빠져 있다.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뒤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온 것이 후회막급, 이민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부인이 얼마전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떠나버려 남은 아이들과 살아갈 생각을 하면 막막할 따름이다.
반면 작은 것에서 보람과 의욕을 찾아야 한다는 4050도 있다. LA시 노인국의 헬렌 이(50)씨는 197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이민을 왔다. 간호사로 일하다 92년 커피샵을 인수할 때까지는 다른 한인과 비슷한 삶이었다.
“커피샵을 처분한 뒤 42세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에 다시 들어간 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는 이씨는 2002년 대학원에 입학함과 동시에 LA시 노인국에 취직했다.
이씨는 항상 노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짐이지만 현재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며 생활의 만족감을 찾고 있다. 이씨는 “한국에서는 누가 46세 아줌마를 공무원으로 뽑겠냐”며 “한국에 있었으면 4050에 이런 삶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 이민온 광고대행사 CPL의 이민구 부장도 ‘3년 정도 외국 생활을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뒤늦게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망이 컸다. 커뮤니티 규모가 작아 한국에서처럼 큰돈을 굴리며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했다. 한국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이 이곳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자녀교육을 생각하면 큰 위로가 된다. 요즘은 한국의 친구들이 아이들 교육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편”이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조만철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4050은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는 세대지만 필요하다면 ‘지금 하는게 낫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며 “풍부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만큼 자신감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성공한 사업가인 홍명기 듀라코트사 사장은 “20년 전 50을 갓 넘어 직장생활을 그만둘 당시 내가 내린 결정에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으나 아내의 격려와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하루 3-4시간씩만 잠을 자며 매달린 것이 좋은 결실을 가져왔다”며 4050의 도전과 노력을 강조했다.
<특별취재반>
안상호 부국장(특집1), 황성락 차장·이의헌 기자(사회),
황동휘 차장(국제), 정대용(경제)·박동준(특집1)·
이주현 기자(특집2), 이승관 차장·
신효섭·서준영 기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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