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
바빴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쉬면서 가끔씩 한국 비디오 테입을 본다.
최근 신문에서 읽었던 화제의 비디오 테입인데 시대 풍조라서 그런지 요즈음은 불륜을 다룬 줄거리가 많다.
이 연속극도 그중의 하나인데 중년이면서도 사과처럼 상큼하고 물방울처럼 통통 튀는 부인과 다정다감하고 미남인 남편, 그토록 아름답던 부부사이가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에 이르러 합의 이혼에 도장을 찍고나와서 그 어색하고 삭막한 순간을 애써 태연한 척 감정을 억누르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하며 25년전 내가 겪었던 그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나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불행이었고 무엇보다도 친구들과의 평행선에서 낙오되었다는 부끄러움과 어린 두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방황하는 중에 한 친구의 주선으로 이민 브로커를 통해 급조된 방문비자를 받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두달여만에 이 땅을 밟게 되었다.
그 시절 전업주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야쿠르트 배달원이나 보험 모집원, 아니면 파출부가 고작일텐데 내 용기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소문으로 듣자니 미국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고 하기에 두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체면 차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6촌 조카들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처음 두 주 정도는 춥지 않은 2월의 아름다운 날씨와 난생처음 대하는 이국풍경에 신기하기만 하다가 같이 생활하는 조카들은 학교나 일터로 나가고 좁은 아파트에 혼자 남아 지내자니 두고 온 아이들이 걱정되고 무엇이든지 일을 하고 싶지만 영주권이 없으니 생각에만 그칠 뿐 하루종일 긴 시간을 하얀 페인트칠 된 방벽만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울기도 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5천불만 주면 위장결혼을 하여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멀리 덴버에 사는 중학교 동창에게 전화로 하소연이라도 하면 그 친구는 이 땅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너무 힘들고 고달프니 좋은 사람 만나 평생을 같이 해야한다고 충고한다. 재혼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조카가 운영하는 가게에 단골로 오는 손님 중에 싱글인 지금의 미국인 남편을 소개받고 두달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게되었다.
61년도 시골에서 여고를 졸업한 후로는 영어와는 상관없이 살아왔으니 입이 있어도 하고싶은 말이나 해야할 대답을 못하는 답답함에 생각다 못해 나는 한영사전을, 남편은 영한사전을 놓고 단어를 찾아 짚어가며 생활을 시작하였다. 남편과 세이프웨이 샤핑을 가면 진열대에 가득한 물건들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수북히 쌓여있는 값싼 바나나를 보면 큰아이 소풍갈 때 남대문시장에서 큰돈을 주고 두개를 샀던 기억이 나서 나중에 아이들이 오면 실컷 사주리라고 다짐했지만 후에 미국에 온 아이들은 그다지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의 재래식 시장 장보기는 같은 물건이라도 보기 좋고 비싼 것을 사곤 했는데 남편은 휴대용 계산기로 찍어가며 파운드당 페니 하나라도 싼 것을 고르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꽁생원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월급으로만 살아가면서 손수 두 아이들을 성장시키며 집을 지니고 살아가자니 절약이 몸에 배인 모습을 높이 사게되었다. 그리고 지갑에 현금을 절대 넣고다니지 않고 5불 미만이라도 체크를 쓰는 모습이 따분하고 지루하기도 했는데 최근에 읽은 신문의 경제면에서는 절약의 방법중에 현금 대신 체크를 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하니 아이들에게도 권해볼 작정이다. 20불짜리는 아주 큰돈으로 여기는 남편으로부터 처음 용돈으로 20불을 받았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현찰로만 유통하던 한국에서의 생활습관이 여기서도 여전히 큰돈을 지니고 다니니까 강도들의 표적이 되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나는 지금도 손쉬운 현금으로만 생활하고 남편을 체크나 크레딧카드를 사용한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미국생활은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애태우던 영주권도 쉽게 받게 되었고 일년 후에는 그토록 그리던 아이들도 초청하여 같이 살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해서 다니기 시작했고 나도 일자리를 얻어 일을 다니니 일찍 일터로 가야하는 나를 대신해서 남편은 낮 근무에서 저녁근무로 시간을 바꾸어서 아이들의 등교를 도와주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스와 함께 날짜와 이름을 적은 브라운백에 넣어놓고 아침 식탁에는 반숙한 달걀을 작은 컵에 세워놓고 위만 조금 깨서 자른 토스트를 찍어먹게 해주고 아니면 프렌치토스트나 팬케익 등 다양한 변화로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곤 하였다.
주말이면 식구마다 자전거를 타고 내가 맨 앞에 나가고 두 아이들은 중간에, 남편은 뒤에서 따라오며 공원이나 바닷가로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디즈니랜드나 샌타크루즈 등 놀이공원으로 여행하였다. 남편은 아이들과 같이 뒹굴고 장난치며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이해해주니까 그 아이들은 다 성장한 지금도 친구처럼 아무 거리감없이 지내며 모든 것들을 상의하고 결정하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식의 엄마 말에는 별 반응이 없고 그저 엄마의 잔소리로 여겨버린다. 결국 내가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남편을 통해서 하게되고 그의 말을 순순히 믿고 따라준 아이들은 작은 탈선도 없이 반듯한 성인이 되어 각자의 몫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다.
파트타임으로 시작한 일터에서 처음 받은 돈으로 한국생활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던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을 샀다. 함께 쿠킹스쿨에 다니며 배운 대로 음식도 해보고 케익도 구워가며 지내는 동안 일터에서 받는 작은 돈으로 다니는 미장원에서 시작하는 계에 가입하여 불입하기 시작할 때 남편은 크게 놀라며 힘들게 일해서 번돈을 그것도 현금으로 남에게 넘긴다고 염려와 걱정을 때로는 불안해하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불입하고 나서 만불을 현찰로 타서 보여주니 항상 지갑에 20불도 넣고다니지 않던 남편은 눈이 휘둥글해지며 돈을 몇번으로 나누어 은행에 예금하였다. 계속해서 2년후에 이만불을 만들고나니 그냥 은행에 넣고싶지가 않아 궁리를 하면서 신문을 보니 이만불에 나온 구내식당이 있었다. 남편과 상의하고 내가 비즈니스를 하면 적극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둘 다 난생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새로운 일에 대한 의욕으로 온갖 정성을 모아 열심히 했지만 그 가게는 모든 시설이 다 있지만 미국음식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오븐이 없어서 내가 하고싶은 음식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케익이나 쿠키 등 도매점에서 사다가 잘라서 팔기가 싫어서 하루종일 가게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도 오븐으로 해야하는 음식은 밤이 깊도록 만들어서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나가곤 하였다.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처음 해보는 장사라서 재미가 있었다.
밤새 터키를 구어서 정식으로 서빙하니 좋아하는 손님들이 나의 노고를 칭찬해주었다. 너무 힘들면 내가 그만둘 것을 염려한 회사에서는 회의끝에 지붕을 뚫어 환풍기를 설치하고 오븐을 놓아주었다. 그때부터는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89년도 지진이 나던 날도 무서운 줄 모르고 텅 빈 건물에서 나혼자 내일 할 것을 준비하며 벽의 시계가 정전으로 인해 5시를 조금 지난 채 멈춘 것도 모르고 아직도 멀었구나 생각하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마치고 거리에 나오니 신호등은 마비됐고 멀리 다운타운 쪽에서는 검은 연기가 군데군데서 피어나고 소방차들이 굉음을 지르며 여기저기서 발동한다. 15분거리의 집을 40여분만에 도착하니 작은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반가히 맞이하며 고등학생인 큰 아이는 엄마가 염려된다며 차가 있는 이웃집 중국인 대학생 형을 졸라 엄마일터로 찾아나섰다고 한다. 집은 아무런 피해는 없지만 정전이라서 촛불을 밝히고 평소에 쓰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쓴 트랜지스터 래디오를 들으며 긴박하게 보도되는 뉴스를 들었다. 한참 후에 도착한 큰 아이를 부둥켜안고 우리는 처음 겪는 지진의 공포를 무사히 넘기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가게는 하루 13시간 이상의 중노동이어서 다리에 굵은 핏줄이 솟는 고된 일과지만 피곤한 줄 모르고 즐기며 하였는데 2년이 다 될 무렵 회사가 L.A.로 이전하는 관계로 부득이 문을 닫았다. 다시 한국일보 광고란에서 찾은 지금의 캐톨릭 여자 고등학교 카페테리아를 인수하게되었다.
이 곳은 규모도 더 크고 매상도 배가 되어 목돈을 지불해야하는데 먼저 하던 가계에서 불입한 계돈으로 아무 어려움없이 인수하고나니 처음 계불입에 반대하던 남편도 계의 편리함을 알고 지금은 곗돈부터 먼저 챙겨준다.
건강식을 선호하는 회사원을 상대하던 때와는 달리 학생들은 간편한 음식으로 제 시간에 대기가 바쁜 상태지만 긴 여름방학과 휴일 등을 쉬고나면 일년의 절반 정도만 일하니까 우선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긴 여행을 할 수 있어 미국내는 물론 유럽까지 두루 다니면 휴가 없이 가게를 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곤 한다.
시간은 연령을 따라 시속을 낸다더니, 이 가게를 한지도 어언 10여년이 되던 해 초여름 어느 날. 남편의 가슴에 메추리 알 크기의 멍울이 생겨 진찰한 결과 암이라는 판명이 났을 때의 충격은 이 넓은 나라에 나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애써 태연한 듯한 남편도 이따금 어두운 표정으로 의사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말없이 내 손을 잡곤 하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6월 중순부터 항암주사를 투여하기로 하고 그 해 여름 여행으로 미리 예약해두었던 LA로부터 뱅쿠버까지 1주일간의 기차여행을 강행하였다.
어쩌면 이 여행이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를 우울한 마음으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주시하며 앞으로 닥칠 고난을 애써 지워보기도 했다. 유난히 낙천적이고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의 남편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즐거운 대화를 유도하기도 하고 명랑한 몸짓으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며 아름다운 섬 빅토리아에서 고풍스런 영국식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에 앉았다.
차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은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달래주듯이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하프 연주를 들으며 식사를 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를 미지의 불안에 쌓였다. 하프 연주자에게 신청한 ‘오 대니 보이’를 들으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남편의 눈시울도 젖어들었다. 두 번째 신청한 ‘언체인지드 멜로디’를 연주할 때는 우리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만 흘렸다. 행여 이것으로 우리의 인연이 끝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영원한 추억을 만든 잊을 수 없는 저녁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날 저녁의 감상을 되뇌이며 우리가 다시 그곳에 가서 똑같은 식사를 한다 해도 그때의 그 절망 속에서 서로를 달래던 애절함은 찾을 길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 여행에서 돌아와 아예 면도기로 머리를 밀고 입원하여 그 지독하다는 항암주사를 맞기 시작하였다. 채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변하기 시작하는 상태는 무척 겁이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병원을 신뢰하고 의사를 믿으며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지금까지 감기나 몸살도 앓지 않던 건강한 남편이 자기의 현 상태는 삶아놓은 스파게티 국수같이 가눌 수가 없다고 한다. 메추리 알 크기에서 계란 크기의 멍울이 어느새 야구공 만하게 커지는 악성 종양이지만 강한 항암 주사가 시작되자 자라는 것이 멈추는 듯 하였다. 병실에서 밤낮을 함께 지새며 5일을 지내고 걷기도 힘들어하는 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3주를 지내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상태에서 다시 입원하기를 세 번 한 후 수술을 받아야 했다.
봄에 약혼한 큰 아이의 결혼 날짜가 9월 말이어서 수술은 결혼식 이후로 하기로 하고 힘없이 집에 누워있는 이의 시중을 들으며 쾌유를 바라는 사이 학교는 개학을 하고 남편 대신 일하는 이를 한 사람 더 채용하면서 운영하니 마음은 바쁘고 몸은 참 많이 피곤하였다. 그리고 큰 아이 결혼식에는 한국에서 70이 넘으신 언니 세분과 오빠가 오신다 하니 모처럼 오남매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어 반갑고 즐거워야할 내가 너무 지치고 걱정스러운 나머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몇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우며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고 밤에 샤워도 해보고 와인도 마셔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 잠이 온다기에 새벽까지 성경책을 읽다가 생각하니 교회에 새벽기도가 있음을 알고 그 길로 교회에 나갔다. 우선 마음이 편해지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약한 나를 위로해주시는 기분이어서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나갔다. 교회 장로직분인 남편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에 감사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병을 이겨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듯 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중에 치른 결혼식은 아들애와 며느리의 빈틈없는 주선으로 무사히 치렀고 주위사람들로부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는 칭송을 들었다.
갈비뼈 두 개를 제거하고 플라스틱으로 대처하는 장장 4시간 반의 수술을 마친 남편은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고 그 후 세 번 더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도 나 혼자 가게 일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교회에 나가 다섯시 반에 시작되는 새벽기도를 계속하였고 교회에서 직접 학교로 가서 장사도 차질 없이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때였을 것이다.
그렇게 격동을 넘긴 남편은 새해 1월 1일부터 직장에 다시 출근했고, 지금은 암을 극복한 인물로 주위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건강한 몸으로 모터사이클을 타는 즐거움으로 자기 나이 60을 인식하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가게에 나가 8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바트에서 근무하므로 과로가 염려되어 바트에만 출근하도록 권고하지만 즐거운 일에는 피곤이 없노라고 하며 처음 장사를 시작했던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16시간 일하는 것을 고수하고 있다.
이렇게 남편의 회복으로 다시 평온을 찾은 이듬해 내 나이가 벌써 60이 되었고 빠른 세월을 원망하며 뚜렷하게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때 한국에 계신 언니들의 성화가 아들에게 전달되어 두 아들과 며느리의 주선으로 3월 2일 퍼시피카에 있는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가족 친지 교우 등 60여명을 초대하여 조촐한 회갑연을 가졌다.
그날따라 잔잔한 파도와 화창한 날씨까지 나를 축복해주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받았던 수많은 고달픔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60세가 너무 너무 젊어서 회갑연을 하지 않는다고 들어왔는데 지내고 보니 그렇게라도 나만을 위한 하루가 있었음이 즐겁고 가슴 뿌듯하여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날의 사진들을 보며 즐거움을 되새기곤 한다.
그 해 여름 남녀공학의 시골 중학교에서 한 반 60여명의 여자 동창들 중에서 8명이 미국땅에 흩어져 살고 있어 서로 연락이 오가는데 동갑내기들이었고 그중 5명이 의기투합되어 회갑을 기념하여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단행하였다. 40여년만에 만나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동행한 남편들은 안중에도 없고 밤낮으로 웃고 즐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LA에 사는 친구는 자기와 나의 작문이 실린 교지를 가져왔는데 등사기로 인쇄된 마분지를 45년이나 간직하여 갈색으로 변색되어 초라해 보였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던 시절의 향수에 젖게 했다. 오레곤에 사는 친구는 ‘중학교 동창 크루즈’라는 문자와 수를 넣어 만든 하얀 티셔츠를 가져와 같이 입고 사진 찍으며 동창의식을 심어주었다. 덴버에 사는 친구는 성조기가 인쇄된 머플러를 나누어주며 이 땅에 사는 의미를 되새겨 주었다.
나도 몇 년 동안 바쁜 틈을 타서 배웠던 매듭장식을 각자의 기호에 맞게 크리스천인 덴버 친구에게는 십계명이 적힌 장식을 달아서, 카톨릭인 두 친구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형상을 달고, 무신교인 친구에게는 태극문양의 북이 달린 매듭을 전하며 우린 서로 감격하여 얼싸 안았다.
귀밑까지만 길러야 했던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 검정 스커트의 통일된 모습으로 찍힌 흑백 졸업사진을 놓고 이름을 적어가다가 그 중에 4-5명은 누구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잊혀진 이름도 있었다. 더구나 월드컵 축구경기가 8강에 이어 4강에 돌입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손뼉치며 ‘대한민국’을 소리 높여 외쳐대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도 흘러 일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프리웨이에서 큰아들로부터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으며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할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며느리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민왔어도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한국어를 쓰고 읽으며 어른께는 존대어까지 쓰며 자라, 나와는 서로 말이 통하고 한국음식은 요리까지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는데 이제 귀여운 손자까지 얻게되니 그 기쁨이 배가된다.
이혼 후로 지금까지 본적지로 재입적되어 호주인 오빠의 호적에 등재되었는데 호적 정리기간인 때를 맞추어 내 신분을 확실히 해주기를 원하는 오빠의 의견대로 지난 봄 영사관에 가서 대한민국 국적 상실신고를 마치고 나서 마음이 착잡하고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손자의 탄생은 나로 하여금 이 나라 시민이라는 부동의 자리에 서게 만든다.
세계 각국의 인종들이 모여 살며 혼혈상태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몇 대 할아버지는 영국의 피가 흐르고 그 할머니는 독일계통의 혈통이라는 등 뿌리를 찾는다. 이 아이가 자라서 몇 대가 흐르다보면 순수한 한국의 혈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니 그 때 할머니는 한국인이었다는 최초의 주상으로 불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이 아이에게 한국인의 얼과 긍지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연장되어 80세까지도 능히 살아가는데 돌이켜보니 허둥대며 지낸 시간들이 벌써 내 인생의 3/4을 보내고 말았다. 이제 남은 1/4의 내 인생에 지표를 삼으라는 듯 작년부터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소셜 시큐리티 오피스에서 편지를 보내온다. 은퇴를 계획하고 실천해야하는 시점이지만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60세를 회갑이라고 일컬으며 지키는 한국과는 달리 여기는 65세 생일을 기념하는데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는 3년 반 후에는 남편과 내가 똑같이 65세가 되고 결혼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세가지 의미를 담은 큰 파티를 마련하자고 지금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미국인 남편과 생활하니까 영어는 문제없이 잘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나의 경우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이곳 생활이라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니 모든 서류처리나 세금납부 등 남편의 영역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이해 못하는 질문에는 남편이 대신 해주니까 굳이 영어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안이함 때문에 지금처럼 문맹이 되고 말았다.
홀로서기에 자신이 없으니까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이야기 하지만 운명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영어공부를 해야 할텐데 신문에서 대하는 생활영어도 읽는 순간은 이해가 되고 사용할 것 같으나 신문만 덮고 나면 전혀 기억이 되지 않으니 난감할 뿐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초고속 컴퓨터 만능시대에 살면서도 온/오프에만 익숙한 채 희미한 기억력으로는 TV나 오디오, DVD 등 그 많은 버튼들을 사용하기가 겁이 나서 아예 포기하고 살고 있다. 얼마나 속도에 둔하면 프리웨이 운전도 못한다고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만 미국임 시어머니나 시이모께서도 프리웨이 운전은 남자들의 몫으론 돌리는 집안 내력을 내세워 나도 가풍을 이어 받아야한다는 억지를 부리며 굳이 위험을 느끼는 프리웨이 운전을 피하고도 별 불편없이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단순하고 간편하게 살고 싶고 작은 것이라도 내가 손수 해야만 하는 습성 때문에 뒷마당이 비슷한 아래윗집 모두 한달에 한두번씩 정원사가 와서 돌보지만 유독 가운데 살고 있는 나만은 손수 물주고 풀을 뽑고 벌레 약을 뿌리고 달팽이도 잡아주며 보살핀 나무들이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우게 되면 너무도 예쁘고 신기해서 보고 또 보고한다. 남편은 꺾어다가 꽃병에 꽂으라고 하지만 꺾은 꽃은 바로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꽃을 꺽지도 못하고 꺾은 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교회 목사님은 오래 전 내게 시민권을 취득한 기념으로 이른 봄 잎도 따지 않은 장미나무 뿌리를 선물해 주셨다.
식목일을 정해놓고 벌거숭이산에다 나무를 심으며 산림녹화라고 쓰인 리본을 가슴에 달고 등교하던 지난달, 나무를 벤다는 것은 위법으로 상상도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첫 해 성탄절을 맞이하여 집집마다 잘린 큰 나무를 사다가 트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서늘했는데 성탄절이 지나고 나니 거리 모퉁이마다 뒹구는 마른 나무를 보며 괜시리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다음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트리를 장식해야겠는데 도저히 마음이 아파 밑둥 잘린 나무를 살 수가 없었다. 아이들도 어린데 성탄 트리는 있어야 하겠고 생각다 못해 뒤 창고에서 중간 크기의 사다리를 내다가 리빙룸에 놓고 그린색 침대 시트를 씌운 뒤 장식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색등을 켜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퇴근한 남편이 보더니 너무나 기상천외한 풍경에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성탄 트리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비록 생나무에서 나는 싱그러운 향내는 없어도 분위기는 엇비슷했다.
다음해부터는 12월이 되면 교회에 트리는 증정해도 집에는 사지를 않았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로는 화분에 심어진 작은 소나무를 사서 장식하며 잘 보관했다가 또 사용하며 명절을 보내지만 12월 23일까지 묶여진 그대로 수북히 쌓여있는 나무시장의 생나무들은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전쟁을 겪으며 누구나 가난하고 부족한 것뿐이던 그 시절 검소와 절약만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온 내가 지금은 어디를 가나 넘쳐나는 물질의 홍수속에서 사니까 모든 것이 즐겁고 풍요로워야 할텐데 오히려 옛날 어렵던 시절의 작은 것에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아끼던 때가 향수처럼 그리워진다.
4년전 시어머님께서 뇌졸중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후 살림을 정리하는데 가구나 옷가지들은 구세군에 연락해서 도네이션했지만 그분이 간직해온 사진들은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하는데 수십권의 사진첩과 스크랩북, 그리고 상자마다 담겨진 가족 친지의 사진들을 몇 달에 걸쳐 처치하고 나서부터는 사진 찍기를 삼가고 있다.
여행가는 곳마다 생일이며, 모든 행사에 빼놓을 수 없이 찍어낸 사진들이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처치 곤란한 짐이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꼭 남기고 싶은 것들만 간추리고 또 간추린다. 묵은 사진첩을 들추다 보니 문득 고향 생각이 났고 그동안 잊고 살아온 젊은 날의 추억들이 그리워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고향친구들이 보고싶고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 산소에 성묘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작년 여름, 오레곤에 사는 친구 와 함께 고국방문을 추진하였다. 미국인 남편과 산다는 평범하지 않은 여건이 큰 잘못은 아니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 고루하게 남아있는 체면 때문에 고국을 떠나온 후로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던 고향땅. 이 기회에 아예 고국 산하를 전부 돌아보자고 고국방문 스케줄을 여행사에 예약하고 제주에서 설악까지 돌며 벅찬 감회에 적었었다.
관광지 개발로 인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무엇보다 안타까웠고 유명 사찰들은 입구까지 점령한 상가들이 눈에 거슬렸지만 모처럼 밟아 본 고국땅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서울은 끝없이 펼쳐진 아파트 숲과 넘쳐나는 차량의 행렬, 그 속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인파로 하여금 대도시의 면모를 과시하지만 김포가도 등촌동에서 상가 겸 주택에 살고있는 언니집에 머물며 돌아본 주위는 거리마다 골목마다 음식점들로 줄을 이었고 버스 주차장이나 지하도 입구 계단들마다 음식좌판이 행인의 손길을 기다리는데 넘쳐나는 먹거리에 오히려 식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떠나올 때 코흘리개 어린이에서부터 대학생이었던 조카들은 이제는 성인이 되어 어엿한 가장들이 되었고 판검사가 된 조카들도 있고 벌써 사오정으로 밀려난 조카들도 있어 희비가 교차되기도 했다. 가을이면 누런 벼이삭으로 황금물결을 이루어 풍요롭던 곳, 친구들과 함께 우렁이를 잡고 자운영 나물을 캐던 그 넓은 평야를 신설된 고속도로로 관통하며 도착한 고향은 한가하던 작은 소읍이 아니고, 이제는 대학까지 들어선 어엿한 중소도시로 변모하여 이제까지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던 추억의 거리는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몇몇 친구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어 어렴풋이 찾아낸 집터들은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사라져 버렸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동네가 호텔 등 3층이상의 건물로 들어선 낯선 거리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리며 지나간 세월의 무게를 반추해 보았다. 웃음 많고 꿈 많던 소녀들이 어느덧 손자 손녀를 거느리며 혹은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됐거나, 거동을 못하는 남편의 병 수발에, 그리고 서너 친구는 이미 이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피부는 탄력을 잃어 주름진 외모지만 십대 때처럼 풋풋한 미음으로 밤을 세워가며 이어진 진솔한 대화들은 각자의 굴곡진 삶의 무게를 지혜와 용기로 헤쳐나온 생생한 체험담이었으며 때로는 같이 울고 웃으며 허물없는 우정을 나누었다. 친구들과 함께 피로를 풀기 위해 몇번 찾아갔던 찜질방의 매력은 단연 이번 모국 방문의 극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나를 매료시켰고 여자들은 한국에 사는 것이 편하든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기약없는 이별을 하며 돌아왔지만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영원토록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가 더욱 아름답다는 어느 노 정치인의 말처럼 말 설고 물 설은 타국에 살면서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힘들었던 순간 순간이었지만 어느덧 나에게 이토록 차분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진다. 62세 되는 생일 날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