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어 책에 실렸던 수필의 제목으로 저자는 안톤 슈낙이었던 것 같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으로서 열거된 여러 가지 상황 중에 “화려한 파티가 끝난 후에 가냘픈 여인의 모습”이란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모교에서는 농구가 한참 인기였는데 우리 팀이 결승 리그에 오르면 공부는 오전수업으로 끝내고 오후에는 농구응원으로 법석을 떨었었다. 이렇게 일단 결승을 치르고 나면 혹은 챔피언이 되더라도 그 다음엔 허탈이 엄습했던 기억이 있다. 너나 없이 “우리”가 되어서 함께 뛰고 목쉬도록 소리지르고 응원하다 응원단끼리 싸움이 붙기도 했다.
공부벌레도 주먹도 선수들도 다 “우리”가 됐었다. 쫓아온 중학교 후배를 타교생 누군가가 건드렸다가는 온통 싸움 바다가 된다. 의리의 꼬마들이 의리의 사나이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선 여전히 차가운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특히 “응원하느라 시험준비는 전혀 못했다”던 아이들이 90점, 100점을 받을 때면 “우리”가 “나”로 돌아오는 순간을 확인하며 더 큰 허탈을 경험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인간의 본성 중에는 “나”를, 자아를 종종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제 잘난 맛에 살다가도, 더러는 불만스런 자신을 잊고 싶은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취해보기도, 미치기도 하며 더러는 “우리”속으로 들어와 나를 잊는 경험을 한다. 수천 년 흘러 내려온 한민족의 한(恨)속에 그리고 수천 수만 년을 이어갈 “우리”의 정(情) 속으로 “내”가 녹아드는 것이다.
“나”라는 작은 물거품을 잠시 잊고 큰 나, 즉 “우리” 속으로 함몰돼 열광하며 ‘대-한민국’을 환호하던 지난 한 달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현상은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동일시 (identification) 혹은 합일화(incorporation) 등의 방어기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한민족의 특유한 개념인 “우리”가 되는 “우리화”(we-ness)라는 신조어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나”의 경계가 얇아지고 무너져서 “우리”가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경험이었다. 불만스러운 “나”와 부끄러웠던 과거를 자랑스런 현재와 “우리”로써 청산하는 집단경험(collective experience)도 했고 월드컵을 통해서 2세들에게 준 뿌리교육의 효과도 대단했다.
7,000만이 하나가 되어 “우리”가 되어서 자랑스러움과 자신감을 체험했으니 이제는 7,000만이 개개인의 “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 때가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때인 것 같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나를 허탈하게 하는 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차가운 현실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일해야 하고 여전히 세금내야 하며 자녀들을 돌보고 미루어 두었던 골치 덩이들도 다시 풀어보아야 한다.
가정불화가 있던 이들은 다시 불화의 가정으로 돌아가며 외로웠던 이들은 더욱 외롭고 일이 지겨웠던 사람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환호와 환희 뒤에 오는 허탈 그리고 그 허탈을 극복하며 성숙하는 “나”를 이뤄 가는 과정이다. 환희가 컸듯이 허탈이 깊은 것도 정상반응이다.
적어도 며칠의 여유를 자신들에게 주고 잠시 허탈일랑은 밟고 일어서자. 오랜만에 경험한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의 뿌듯함을 잊지 말고 각자의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곤 자랑스런 “우리”의 다음 파티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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