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년 11월26일,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전국에서 모인 성직자들이 33개에 이르는 신조(信條)를 최종 확정했다. 종교개혁과 갈등 속에서 개혁교회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교리를 마련하기 위해 4년간 1,163회에 이르는 회의를 거친 끝에 마련된 33개 조의 명칭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신앙고백이란 표준교리다. 모든 기독교가 공유하는 사도신조(사도신경)가 대표적인 신앙고백이다. 스위스 태생의 19세기 신학자 필립 샤프에 따르면 ‘성서는 신의 말씀이고 신앙고백은 신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전에도 스위스와 프랑스·스코틀랜드·하이델베르크 등의 신앙고백이 나왔지만 잉글랜드의 상황은 보다 복잡하게 얽혔다. 국왕 헨리 8세가 형수였던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영국 교회의 머리는 국왕’이라는 수장령(1534)을 발표하며 로마 교황과 분리를 시작한 이래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가톨릭의 재산권을 박탈하며 상대적으로 이익을 본 신흥 자본가들은 의회의 깃발 아래 뭉쳤다. 찰스 1세와 의회의 반목으로 내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은 기존의 ‘39개 신조(1562)’를 대신할 신앙고백서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찰스 1세와 싸우던 의회는 ‘장로교 정치·종교체제 수용’을 조건으로 스코틀랜드를 끌어들였다. 잉글랜드 전역에서 모인 121명의 ‘학식이 있고 경건하며 슬기로운 성직자’와 국회의원 30명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랜드 참관인 4명은 투표권이 없었어도 모든 토론을 주도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장로교 형태의 정치체계’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의회는 1647년 모든 문서를 승인했지만 잉글랜드에서의 생명은 길지 않았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왕정복고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잉글랜드에서 핍박받았다.
대신 다른 곳에서 빛을 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 통합(1707)될 때 신앙적 일체감을 자기 위안으로 삼았다.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교리(2개 조 추가)로 자리 잡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통합과 표준의 정신이 담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한국의 현실은 딴판이다. 교회가 끝없는 분열로 수백개의 교단으로 갈라졌으니까. ‘오직 성서’만을 강조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첫머리에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계시하던 방법은 이제 끝났다’고 명시돼 있으나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성직자도 많다. 샤머니즘과 뭐가 다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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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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