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바나나 한 송이 가격은 대략 5,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문 칼럼에서 바나나는 ‘비행기 요금보다 비싼 과일’로 묘사됐다. 자장면 20그릇에 육박하는 가격이었으니, 중산층도 쉽게 먹기 힘든 고가 식품이었다. 1991년 수입자유화 품목으로 지정되면서 수입량이 늘어 값이 싸지기 전까지, 구상무역으로 소량만 국내 반입이 된 외국산 바나나는 ‘금덩어리’ 자체였다.
■ 아열대 기후 작물인 바나나는 1895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 이후 일본이 신생 식민지 대만을 통해 들여온 것이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1478년 편찬된 ‘동문선’에 바나나로 보이는 ‘초황’을 거론하는 문장이 나와 추정하건데 연노란 이국의 과일을 조선인들도 전혀 모르진 않았으리라 보인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고서야 1928년 뚫린 대만과 조선의 직항로를 거쳐 서울로 대량 공수된 대만산 바나나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신비로운 과일로 꼽히면서 인기를 끌었다.
■ 수입으로만 맛보던 바나나는 1981년 제주 농업기술원에서 상업재배가 처음 시도되면서 국산 작물로써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온난한 제주 기후와 하우스 재배 기술 덕분으로 생산량은 빠르게 늘었고 1988년 즈음엔 연간 2만 톤 이상 재배돼 외국산 수입량을 훌쩍 넘었다. 한때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체결로 타격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균기온 상승을 불러온 기후 위기가 국내산 바나나를 살렸다. 2010년대 들어 재배지가 제주도를 넘어 충남까지 확대되면서다.
■ 이달 초 강원 춘천시에서 바나나 나무들이 실내나 온실이 아닌 노지에서 열매를 맺는 장면이 목격돼 화제가 됐다. 비록 날이 풀리면서 노지로 옮겨 심은 경우지만, 연평균 최소 15도 이상이 유지돼야 견디는 바나나가 북위 37.88도 춘천시에서 멀쩡히 자랐다니 놀라운 일이다. 연일 한낮 기온 40도에 육박하는 최악 폭염이 사람 생명마저 위협하는가 하면 작물 생육지도마저 완전히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남방한계선을 거듭 경신하는 바나나의 북진은 뒤집어보면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양홍주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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