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1일을 기해 미군 500만명과 영국군 100만명이 일본 본토에 상륙, 점령작전에 들어간다. 작전 기간은 최대 2년. 필요하면 원자폭탄을 7발까지 투하한다.’ 미국이 구상했던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의 골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2발을 맞은 일본이 항복, 실행되지 않은 작전이다.
미국은 미군과 영국군만으로 여의치 않을 경우 프랑스와 소련·중국군까지 끌어들여 분할하는 방안도 만지작거렸다. 전함 24척의 거포로 산업시설을 잿더미로 만들고 영원히 농업국가로 남기는 방안도 포함했다.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에 대비해 일본도 ‘결호(決號) 작전’이라는 대응책을 세웠다. 1945년 3월 규슈에 전투사령부를 두고 만주국과 조선 등에서 모은 병력이 약 90만명.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니었으나 대부분 신병에다 30만명은 소총조차 없었다.
전투기 등 각종 항공기는 1만대가량 보유했으나 조종사가 모자랐다. 해군도 항공모함 6척과 전함 1척, 순양함 4척, 구축함 20척, 잠수함 40척이 남았지만 개전 이전과 비교하면 괴멸 상태였다. 미국은 왜 기진맥진한 일본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병력을 모으고 전쟁 능력을 말살하려 했을까.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역저 ‘국화와 칼’에 답이 나온다. 서구 국가끼리 전쟁에서 전사자와 포로의 비율은 통상 3대1. 병력을 절반가량 잃으면 명예로운 항복으로 간주했으나 일본군은 전혀 달랐다.
전사와 포로 비율이 120대1. 항복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미군 18만명이 상륙해 연인원 54만명이 투입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4만6,195명이 죽고 5만5,16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점도 병력 대량 투입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토 결전을 앞두고 일본은 1억 국민 옥쇄(玉碎)를 부르짖었다. 옥이 깨지듯 아름답게 죽으며 ‘천황’을 지켜내겠다는 뜻이다.
계획이 원폭 투하로 인해 무산되자 미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본토 상륙 시 사상자 100만명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일본은 오늘날 유일한 핵 피폭국가로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몰락 작전이 실행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범국 일본은 멀쩡했건만 피해는 한반도가 뒤집어썼다. 분단과 전쟁의 고통까지 겪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을 세우던 백범 김구가 예상보다 빠른 항복 소식에 땅을 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그러진 현대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저들의 죄를 우리 민족이 대속한 것도 모자라 강요에 의해 억지로 손잡아야 할 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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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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