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6.25 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언급하며 미군의 희생에 감사를 표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18세의 서울대 공대 1학년 학생이었으며 부잣집의 가정교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며 광화문에서 전차에서 내렸다. 난데없이 광화문 사거리와 종로 일대 상공에 나타난 인민군 전투기의 공습! 전혀 전쟁준비가 없었던 한국은 한대의 비행기도 없을 때였다. 인민군 전투기는 저공으로 비행하며 거리의 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당시 광화문 사거리에는 리어카 장사들이 많았는데 갑작스런 인민군의 공습과 기관총소리, 죽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길바닥에 무조건 엎드려 책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 방송이 나왔다. “국민 여러분! 아군은 적군을 무찌르고
북진중이오니 국민 여러분은 아무 염려를 마시고 여러분의 평상시 일들을 하십시오...” 라고.
하지만 6월28일 아침 이미 인민군의 소련제 탱크들이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돈 있고 정부와 통하는 빽 있는 사람들은 하나밖에 없는 한강 철교가 폭파되기 전에 이미 남하한 뒤였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달라진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 준비가 되었었는지 길가에서 인민공화국 깃발을 휘날리며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학교 소사가 약자가 된 교장을 잡으러 다니는가 하면 말단 노동자가 인민군 완정을 차고 자기 상사를 잡아다 ‘반역자’ 라며 두드리곤 했다.
같은 해 9월28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번에는 못 된 하급 공무원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강자에게 잘 보이려고 과거에 개인감정이 있었던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 ‘피난 안간 적색분자’라며 끌고 가 마구 때리곤 했다. 한강 다리가 끊겼는데 어떻게 피난을 가란 말인가? 우리 큰 아버지와 아버지도 그 때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이런 현실을 경험한 나는 병역 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 장교가 되려고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올려 그 당시의 유행어였던 ‘소모품 소위’가 되어 보병 수도사단 최전방에서 매일같이 죽고 죽이는 전투를 했고 적에게 포위도 여러 번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복학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조폐공사에 입사했지만 부정부패에 대한 입 바른 소리를 자주하다 ‘병역 기피자’라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파면을 당했다. 그 당시의 한국은 현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패했고 가난했다.
오늘의 한국은 67년 전과 비교할 때 정말 많이 발전한 부유한 나라가 됐다.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만일 오늘 67년 전 전쟁과 같은 현실이 다시 일어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상상해 본다. 이 전쟁은 국가지도자와 국민들 간의 의미, 그리고 이념의 비극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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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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