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던 여름도 한 주간의 무더위와 함께 가 버리는 느낌이다. 이제 곧 가을바람이 불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을 헤아려 볼 것이다. 살아온 시간 보다 앞으로 살 시간을 생각해 보다가 과연 무엇이 나를 만드는가 새삼스러운 질문이 떠올랐다. 또 한국을 방문 중인 아내를 생각했다.
며칠 전 아침에 카톡으로 아직도 옛날에 듣던 고물장수들의 “고물 삽니다”라는 구성진 목청으로 잠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다며 나이 먹는 것이 마치 고물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답을 보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 속에 있는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다.
나이가 나를 만드는가 아니면 쌓여온 삶의 무게가 나를 만드는가? 무엇이 나를 만드는가? 엷어지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머리가 히피처럼 길다고 경찰서에서 머리를 깎이던 시절을 생각하며, 내가 아직도 그 옛날 히피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 청년인지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전혀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그 사람이라는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이 과연 나를 만드는가?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체로 직장과 가정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한 직장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을 하고, 그 일이 자기가 원하는 일이요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이나 꿈을 실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이나 직업이 생활을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 것이 즐겁지 않다면 어떻게 하는 일로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런 경우 가정생활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일이 피곤하고 답답해도 가정에 돌아와 평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면, 다행히 행복의 한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가정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항구에 돌아와 닻을 내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민 1세대에 속하는 우리 한인들의 경우, 직장이나 직업이 꼭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하는 일을 즐기기 보다는 해야만 하기에 쉴 틈 없이 밤낮으로 일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 가정생활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이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어떻게 오손도손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밥 먹고 잠자기 바쁜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나 가정은 여관이나 식당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난 지 오랜 중년이후의 가정은 적막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그 적막함을 깨느냐 하는 과제는 결국 각 개인의 용기 있는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말이면 골프채 메고 나가야지 언제 마누라하고… 대화는 무슨 대화!
더운 여름가고 가을은 오는데, 우리 인생에도 길었던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는데,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루 쉬면서 늙어가는 마누라 손잡고 하룻길 나들이 갈 수는 없을까? 주 중에 하루는 비즈니스 걷어치우고 휴식할 수는 없을까? 놀이터의 어린이가 되어 Life Is Good 소리치며 하루를 즐길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저녁이 늦었는데 또 한국에 간 아내가 카톡으로 문안이다. “여보 까꿍!” 어이가 없다. “워디서 뭐 허능겨?” 진한 충청도 사투리로 답을 했다. 대전에 계신 누님을 뵙고 찍은 사진을 보내 왔다. 곱기만 하던 누님의 모습도 세월의 무게를 가득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은 우리의 결연한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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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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