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느 주간지(주간 중앙 2013년 10월 4일자 26면)에서 죽음을 다룬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의 주민 역을 맡았던 신구씨의 인터뷰 내용을 읽었다. “죽음이나 이별을 다룬 작품은 많은데 이 작품만의 매력을 말씀 하신다면….” 이라는 기자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누구 말마따나 ‘숨 들이 쉬었다 내뱉지 못하면 죽는 것’일 뿐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게 돼요. 사실 죽음이란게 우리 옆에 있는 건데 그게 나하고 동떨어진 사건이고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 하잖아요. 바로 우리가 죽음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사람이 산다는 건 떠나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도 곧 모든걸 놔야 겠지. 가는 거야 피할수 없지만 이루지 못한 몇가지 가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요.
살아 생전에 계획한 것을 이룬 사람이 젤 행복한 사람이겠지.” 마침 내가 간병하던 장모님이 급성 폐염으로 오코너 병원에서 생사기로에서 허덕이던 위기를 겪던 터라 그의 글은 그 어느때 보다 심각하게 내 마음에 다가와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새벽 다섯시쯤 불길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장모님이 감기로 심하게 기침하시던 것만 뵙고 어제 저녁 떠났었는데, 스카이 라인 간호원은 위독하시니 급히 오커너 병원으로 가라는 메시지 였다. 정신없이 옷을 챙겨입고 병원 이머젼시룸에 갔을 때, 장모님은 링거를 포함한 수없는 주사줄에 꽂힌채 무의식으로 침대위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계셨고, 번쩍이는 모든 계기판들의 숫자는 위험수위를 넘어 있었다. 간호부 얘기는 오늘 내일이 고비라는 것이었다. 잘 넘기실 것 같다고만 했다. 나는 장모님의 따스한 온기있는 손을 잡고 모든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먼저하고, 물끄러미 열이 올라 상기된 장모님 얼굴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이것 저것 생각을 계속했다.
죽음은 불과 하루 저녁 사이에 찾아올 수 있고, 몇십년을 살았든 하루 이틀 아니 몇시간 몇분 사이에, 짧은 순간에 결정이 날 수 있구나 생각이 되었다.
사실 나는 작년에 거의 같은 체험을 했었다. 불교신자 였다가 나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 하시고 교회 개척 당시부터 나와 함께 하시다가 내 돌봄속에 돌아가신 남 선생님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 분은 폐렴에서 4일만에 회복되서 스카이 라인으로 오셔 또 다른 합병증으로 돌아 가시고 원하셨던 대로 화장을 하셔 산타 쿠르즈 바닷가에 시신 가루를 뿌렸었다. 나는 아버님 같이 모셨던 분이기에, 유가족으로 딸만이 한국에서 오셨었기에 그 슬픔과 쓸쓸함이 더 컸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기에 장례식 횟수도 적지만, 큰 교회일수록 담임목사는 더 많은 장례식을 자주 치루며, 가까운 성도들의 죽음을 맞이하며 죽음에 대해 실감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을 것입니다. 나의 장례식 경험들을 돌이켜 보면 죽은 사람의 나와의 관계의 깊고 엷은 강도에 따라 슬픔과 아쉬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지 상정일 것입니다.
장모님은 다행이 이틀만에 의식이 회복 되시고, 다시 스카이라인에 와 계시지만, 그동안 생각했던, 그리고 장모님에게 가까이왔다 돌아간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이 가을에 벌써 내 자신 인생의 초 가을을 맞는 서글픔을 달래고 월동준비를 위해 죽음을 다시한 번 생각하고 정리해 보는 것은 나 자신과 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쉽게 잊고 지나가는 것은 죽음의 보편 타당성과 불확정성이다. 꽤 오래 되었지만 설교 예화 자료중 지구상에 대충 50억 이라는 인구가 살고 있고, 한 해에 대략 1억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시간적으로 계산을 해 보면 매 초당 3명씩 숨을 거둔다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은 그 수치가 더 많아 졌을 지도 모른다. 지구촌 여러곳에서 일어나는 지진, 전쟁, 질병, 각종 재난이 날로 심해지는 것 처럼 보이니, 한 순간도 쉴세없이 죽음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또 죽어가는 사람들의 순서를 생각할 때 지병을 앓거나 연로해져서 죽음을 예측하고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고, 요즈음 처럼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사고 나 항공기 사고등 전연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당연한 일을 부당한 일 인 것 처럼, 언제든 나의 일이 될수 있는데 남의 일인것처럼 생각하며 나만은 안 죽을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공리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 중에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 구약 전도서 기자도 태어남과 죽음의 보편 타당서을 이렇게 노래 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때가 있나니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때가 있고 세울때가 있다.” (잠언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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