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의 보이지 않는 원천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신념을 가지고 내 직무수행에 더 정진하며 겸손할 수 있었다. 내 삶의 의미와 사명이 늘 새로웠고 고마웠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상황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든 그들의 생활 양상을 눈앞에 떠올리면 공무원21년의 내 지나간 세월이 채색되어 되살아난다. 나의 직장은 다문화 속에서 미국을 배우며 이민생활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최상 최적의 장소였다. 나의 직업은 손님같은 이민자의 내 의식구조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나는1971년 7월 중순 엘에이에 도착했다. 이민짐을 풀고 서너달이 지나서부터 직업을 찾아 나섰다. 그당시 외국인 여자들이 제일 쉽게 빨리 구할 수 있는 직업은 봉제공장의 바느질이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갖기에는 자봉침 사용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융통성이나 경험,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업을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무직이었다. 다운타운에 있는 엘에이 카운티 본부 인사국을 찾아 갔더니 운 좋게도 바로 그날 금요일에 공무원 채용시험이 있단다. 나는 신청서를 내는 즉시 시험장으로 들어 갔다. 영어와 수학과 실생활 문제를 다룬 시험에 당일 합격은 했는데, 문제는 오후의 타자 실기시험이었다. 오후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주말을 지나고 월요일에 다시 와도 된다니 그날 내게 주어진 운은 좋아도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당장에 타자기를 구입해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연습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타자를 배운데다가 여러 해 손도 대지 않았었기에 처음엔 좀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을 타자기에 올려 놓으니, 오랜만에 피아노를 칠 때처럼, 손가락이 저절로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난생 처음 대하는 ‘전기’ 타자기는 손가락에 조금만 힘이 가도 같은 글자를 중복 쳐 갔다. 오자가 없도록 조심하면서 속도 연습에 치중하니 시험에 응할 자신이 웬만큼 생겼다. 중급 타자수는 물론, 한 단계 높은 트랜스크라이버의 자격까지도 인정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사회봉사국 (Department of Public Social Services)으로부터 채용 일자 통보를 받았다.
엘에이 서부 지구(West LA District)로 배치받아 처음 출근한 것이 1971년 12월 21일. 키가 작고 예쁜 50대의 여자 상관이 나를 친절하게 맞았다. 빈 책상을 지정해 주고는 남들 하는 일을 관찰하며 당분간 도우라고 했다. 전화가 끊일 사이 없이 울려 사무실 안은 시끄러웠고, 사무원들은 응급 푸드스템프와 메디칼 카드를 타자찎는 일로 바빴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웰페어 수혜자들에게 그걸 내다주노라 들락날락, 모두들 정신없이 일했다.
가만 앉아 있기가 거북해서 전화를 받았다가, 전화선으로 전해오는 빠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어 얼마나 당황했던지. 전화를 건 사람은 통화 시작부터 화를 내고 있는데, 나는 봉사국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전혀 모르는 주제에 자초지종을 가려낼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내 영어 실력으로는 누가 누구를 찾는 것인지 외국 이름들이 너무 낯설어 메모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영어가 아직 서트름을 상관에게 솔직히 고백했다. 그녀는 두툼한 책 세 권을 내주면서 사회 복지사업의 내용부터 공부해 보라고 했다. 상관으로서도 당장엔 별 도리가 없었으리라.
마침 월말이 가까워 월말보고서 작성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상관이, 며칠동안 책 페이지를 넘기는 분량으로 봐 내 영어 독해력을 알아차린 듯, 월말보고를 한번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한 달간 집행한 사무의 분량을 웰페어 부서별로 나누어서, 응급 처리한 사례의 수와 금액, 오타로 폐기된 카드의 수치 등을 통계내고 도표를 만드는 일은 복잡하기는 해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는 새해로 들어서면서 아예 상관 옆자리에 앉아 특별 대우를 받으며 일반 직무를 차근히 배울 수 있었다. 매달 월말보고는 의레 내 몫이었고 그 일을 하는 2-3일은 아무도 내 곁을 얼씬하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내 위치는 그렇게 굳어갔다.
사무원들과 친해지면서 30이 넘은 내 나이가 미국인들 틈에서는 10년 젊게 보여지는 게 기분 좋았다. 그들의 일상사나 생각을 얘기 들으면서는 가치관이나 생활 태도면에서 나보다 10년 앞 선 세대와 내가 동감하는 사실에 놀랐다. 말하자면 미국인들에게 20대로 보이는 내가 사고방식은 40대로 살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 기형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이렇듯 20년 공백의 격차를 이루는 원인일까?
일 년 동안 사무직 경험을 쌓으며 미국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 나에게 소셜워커로 승진할 기회가 왔다. 그동안 나는 사무원들이 소셜워커 지시대로 타자를 치면서 그들이 콧대가 높다는 등 비아냥하는 소리를 들어 왔기에, 미국에서도 학력이 못 미치면 사회생활에서 제약을 받고 그것이 생활 정서를 좌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었다.
외국인인데 고맙게도, 나는 대학졸업장 하나로 진급 시험에 응할 수 있었고 이번에도 무난히 합격했다. 일 년간 월말보고를 하면서 사회봉사국의 전반적인 프로그램 운영은 물론, 복지사업의 철학과 이념, 사회실황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시험에 제시된 해결 지침사항을 참고하여 복잡한 상황문제를 어려움 없이 풀었고, 면접도 무난히 통과했다.
두 주간 훈련을 받은 후 소셜워커로 정식 일을 시작한 곳은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에코 팍 지구(Echo Park District)였고, 담당부서는 메디칼이었다. 당시 그곳 한인 소셜워커가 나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한인 신청자가 찾아올 때면 나는 내 담당 메디칼이 아니더라도 생활비(General Relief)와 식품권 지원을 위해서 통역을 했다. 한인 케이스가 내 업무량의 4분의 1 에 달하면서부터 나는 이중언어 특별 수당을 받기 시작했다.
한인들을 도와주며 즐겁고 흐믓했던 사례들은 세월따라 희미하기만 한데, 나를 난처하게 했던 허위 증언 케이스들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얄궂고 유감천만이다.
한인과의 메디칼 첫 면담은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웰페어를 신청해야 하는 자기 처지가 같은 한인 앞에서 체면손상이라고 느꼈던지, 한국에서 잘 산 얘기며 장사밑천으로 일 만불을 현찰로 가지고 있다는 자랑을 했다. 메디칼 규정은 집 한 채와 자동차 한 대를 허락할 뿐, 현금, 은행잔고, 생명보험 현가를 가산해서 재산을 가족수에 따라 한정했기 때문에, 나는 즉석에서 그에게 자격이 없다는 결정을 알렸다. 한 번 접수된 서류는 5년간 보관되고, 5년 이내에 다시 신청하면 엘에이 카운티 어느 지구에 가든지 담당 소셜워커에게 전해지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만약 재신청할 계획이라면 앞으로 사업에 투자할 때 관련 계약서나 영수증들을 보관할 것을 권하였다. 사업장비나 사업 은행구좌의 잔고는 그것이 얼마이든간에 재산으로 고려되지 않는 법규도 전했다. “법칙 좋아하시네.” 한 마디 내뱉고 냉담하게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보기 민망했다.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내 직위를 선용하여 한인들을 위해서라면 더 열심히 일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 부상당한 가장, 수술환자, 난치병자, 중풍, 정기 검진 등, 건강보험이 없는 한인들이 그 엄청난 입원비, 수술비, 치료비, 진료비를 낼 수 있게 도와 준 걸 보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잠깐이었다. 해마다 한 번 있는 메디칼 재심에서 몇몇 한인들이 초심때 허위 진술했던 사실이 들어나 나를 당혹하게 했다. 메디칼 신청시에 고의로 숨겼던 재산이나 수입 사항들을 재심에서는 더 이상 비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청 당시 막일을 하던 사람이 일년 사이에 가게를 차렸는데 자금 조달을 어떻게 했는지, 일 년간 월수입에는 변화가 없는데 어디서 다운페이의 목돈을 구해 주택을 구입했는지, 수입보다 많은 지출, 은행기록에 나타난 거액의 예금 등, 거의는 재심에서 설명이 애매했고 설명을 뒷바침할 증빙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다.
대개는 허위가 밝혀지는 즉시 메디칼을 끊고 말지만, 재심 담당자에 따라서는 귀찮더라도 설명서를 꼼꼼히 작성하여 케이스를 수사과로 넘겼다. 그러면 수혜자는 영락없이 그간에 메디칼이 지불한 의료비를 카운티에 물어내야 했다. 실제로 수사 대상인 한인 케이스가 다른 인종에 비해 더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 소수 때문에 한국도 부정부패 국가 대열에 끼었었다. 한인들이 어떤 수법으로 정부를 속이는가를 파악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야말로 수사관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큐바, 월남, 캠보디아, 이란, 러시아, 멕시코, 한국 등, 이민자들이 주류가 되어 몸싸움하며 건물 밖에까지 긴 줄을 섰다. 매일같이 수라장인 대기실을 향해 미국인들은 말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시선과 냉소를 보냈다. 그런 대접 받아 마땅한 사건들이 이민자들 케이스에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이민의 문호가 열리면서 갑자기 밀려든 외국인들이 거짓 증언하리라고 예상하거나 거기 대비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신청자들이 제출하는 증언서(Affidavit/Sworn Statement)를 믿고 관행대로 받아드렸으니까. 이민자들은 ‘기재한 내용이 사실’이라고 서명하는 데 따르는 책임과 어떤 상황 변화도 즉각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거듭 설명해줘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영주권을 분실했다는 한 할머니에게 이민국에 조회하는 규정을 알리고 분실했다는 증언서를 받아 이민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여러 달 걸리는 조회의 답이 올 때까지 메디칼 지급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로서는 마감일 내에 초심 서류 처리를 끝냈었다. 딸의 가족과 함께 사는 그 할머니가 대여섯 달이 지난 후 이민국으로부터 호출을 받고는 놀라서 내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기한 지난 방문 비자로 체류하고 있음을 전화로 실토한 예가 있다. 그러니 갖가지 거짓 증언서의 조회 결과를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그 할머니처럼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었겠는가.
당시 한인사회는 ‘양잿물도 공짜면 마신다’는 풍조였다. 수혜자 자격 규정을 신청 전에 알아내서 은행구좌의 잔고를 빼돌리고 여분의 자동차는 소유 명의까지 바꾸었다. 이민가정의 정착을 돕는 목회자들이 정보를 널리 홍보하고 있고 교인들이 그 정보를 역이용하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신앙은 있어도 양심이 없는 그 어긋난 상관관계를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지… 기분이 씁쓸했다.
아들의 전학을 위해 이사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1980년 초에 밸리 동부 지구(East Valley District)로 전근을 했다. 직무처를 바꾸고 보니, 흑인이나 멕시칸, 이민자들 이외에 백인 노년층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이 새로웠다. 에코 팍 지구와는 천양지차로 대기실이 언제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분위기인 것도 큰 변화였다.
한인 신청자는 거의 없었고, 이민자로는 이란의 피난민들과 러시아의 알미니안들이 많았다. 커미션(?)을 받는 통역관까지 대동하고 오는 그들도 한인들과 꼭같은 수법을 쓰는 걸 알 수 있었다. 미국에 갓 도착해 아직은 수입이 변변치 않지만 이웃 친지의 도움으로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으니 의료비 보조만 해 달라는 식의 시나리오다. 현금거래의 생활비 증언서를 받다 보니, 어느 한 특정 이름이 소셜워커들의 입에 오르내려 결국 그 많은 케이스의 생활비를 보태준다고 겁없이 서류에 서명해 온 그 이름 당사자의 뒷조사가 수사국에 의뢰되기도 했다.
밸리 지역의 백인 신청자들은 대개가 사회보장 연금을 받는 중산층으로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격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지침서의 다양하고도 까다로운 세칙들을 찾아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과반수 이상에게 무료가 아닌 유료 혜택으로 결정을 내렸다. 예를 들면, 부인이 불치의 중환자인데 남편의 재산이나 연금 때문에 메디칼에 자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부인 혼자만 메디칼을 받아 양로원에 가기 위해서는 이혼을 하지 않고라도 공동 재산이 아닌 결혼 전 소유 재산을 법적으로 부인 것, 남편 것 따로 나눌 수 있다. 또 남편의 수입에서 일정금을 부인에게 할애하는 계약을 하여 메디칼의 공제액(deductible)을 줄일 수도 있다. 또 한 예는, 주택 소유자가 종신 부동산(Life Estate) 법을 이용하면 주택을 미리 상속하되 죽을 때까지 그 사용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메디칼 수혜자의 사망 후 상속자가 주택을 팔 때에 메디칼로 지불한 만큼의 의료비 반환을 정부가 요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자격 조건은 참으로 허다하다.
밸리 지역 중산층의 백인들은 대부분 의료비의 일부를 지불하기 때문인지 메디칼을 신청하는 태도가 당당했고 또 속이지도 않았다. 한 번은 백인 노인에게 은행잔고 때문에 당장엔 자격이 없지만, 벼르던(?) 여행이라도 해서 천 오백불(당시의 규정) 이하가 될 때 여행경비 영수증들을 가지고 다시 오면 도와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는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백인들은 정부의 처사에 불평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자격이 없다는 소셜워커의 결정을 들어도 백인들은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아직 극한 상황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여유있게 돌아서는 처세를 보였다.
또 다시 내게 행운이 왔다. 몇 년 전 시험에 합격했지만 채용이 동결되었던 승진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웨스트 엘에이의 ‘봉사부’(Service Bureau)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메디칼 프로그램에 익숙한데다 동료들과의 관계가 편안해 망서렸더니, 상관은 모처럼의 승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사회란 항시 유동적이어서 안일하고 평화로운 현재가 무한정 보장되는 게 아니란다. 밸리에도 ‘봉사부’가 있어 곧 전근해 올 수 있음도 귀띔해 주었다.
다시 전근해 오기까지 일 년간 나는 밸리에 그대로 살면서 복잡한 405 고속도로를 운전하여 웨스트 피코로 출근했다. ‘봉사부’는 봉사국의 복지 프로그램과는 달라서, 봉사 신청자가 아니라 봉사 제공자에게 웰페어가 아닌 급료를 지급했다. 이를테면, 아동과(Child Protective Services)는 부모의 학대나 성폭행에서 벗어나도록 어린이들을 양호가정(Foster Home)에 의탁했고, 성인과(Adult Protective Services)는 노인이 학대받거나 방치되는 사건을 보고 받을 때 응급 조치 봉사를 했다. 그리고 가사 보조과(In Home Supportive Services)는 질병이나 노쇠로 기동하기 불편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시간제 인력을 고용하도록 도왔다. 내 소속은 가사 보조과였다. 신청자의 재정적 자격과 가사에 필요한 보조 시간을 결정한 후 보조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직무가 나에게 주어진 것은 천만다행이다. 만일 부모로부터 아동을 억지로 격리시키는 일이나, 방치된 노인의 시체를 보아야 하는 일이 내게 맡겨졌더라면 아마도 내 운명은 지금과 달라졌으리라.
처음 몇 개월은 굉장히 피곤했다. 하루의 출퇴근 운전이 신경전인데다, 웨스트 엘에이를 포함해서 남쪽으로는 잉글우드, 서쪽으로는 패시픽 팔리세이드, 동쪽으로는 웨스트 할리우드까지 장거리를 오가며 매일 두세 가정을 방문하는 일과가 신체적으로도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케이스마다 한두 시간이 걸리는 면담을 하면서 노인들이 아무 돌파구 없이 과거에만 집착해 살고 있는 외로운 모습을 가깝게 관찰하게 되니, 지치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때가 내 나이 40대 중반이었으니 자신의 노년기를 맞기도 전에 노후를 다 알아버린 것 같아 세상이 더 어둡게만 보였다.
한 세상 살고 가는 인생 행로가 반원경 언덕바지의 등산길과 같다는 생각을 어느날 우연히 하게 되었다. 고개 넘어 내리막 길인 노년기가 처음 오르막 길의 유아기와는 완전 역행인 자연의 순리를 누구라고 순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철없는 어린 아이를 철없는 그대로 사랑하듯이 늙어가는 노인의 철없어짐도 연민으로 대하게 되었다. 철부지 아이를 이해하고 격려하며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었듯이, 이번에는 반대로 노인을 노인인 그대로 용납하고 위로하며 ‘계속 성인이기를 바라는 그 기대치’를 점차 낮추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런 해석이 다행하게도 내 삶에 크게 작용하였다. 이 깨달음 때문에 그후12년 나의 직무는 관용과 인내로 채워졌다.
한번은 곱게 화장한 치매증 초기의 80세 할머니를 면담했다. 인사말로 60여 세로 보인다고 했더니 너무 좋은지, 한 시간 마주 앉아있는 동안에 대여섯 번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묻고 또 물으며 합석한 딸에게 자신의 젊음을 자랑했다. 딸은 자기 자식들을 다 독립시키고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한 생활을 시작하려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부모를 돌보게 되었다며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서도 결국 부모를 돌보는 사람은 자녀들이다. 핵가족 제도로 따로 살고 있으니 오고가고…, 어찌보면 부모 섬기는 일이 대가족으로 사는 우리네 보다 더 번거롭고 힘든 것 같다. 가사 보조 프로그램에 관여하고부터는 얼마나 많은 장년기 미국인들이 노부모와 자녀 틈에서 샌드위치 세대로서의 고충을 겪고 있는지 직접 보게 되어 개인주의 미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게 되었다.
웰페어 수혜자가 아닌 사람이 가사 보조를 받을 때면 자동적으로 메디칼도 받게 된다. 때문에 주택 소유자들은 사망 후 주택 판매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설명 듣고는 면담 후 많이들 신청을 취소했다. 종신 부동산 법의 절차를 밟고 나서 다시 신청하라는 소셜워커의 권면도 가사 보조가 예외로 많이 필요하거나 심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거절했다. 역시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어느 인종이건 다를 바 없나 보다. 본인들이 젊었을 때 어렵게 마련한 주택을 평생 내핍하며 빚(mortgage)을 다 갚았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가감없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노인 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백인들도 그들 나름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내세워 필요 이상의 보조는 사양했다. 대개가 1930 년대의 대공황을 거친 세대들이어서이겠지만, 정부의 돈(국민의 세금)을 함부로 쓰기를 꺼려하며 나라의 주인된 자세를 과시했다. 예를 들면 70-80 세의 백인들은, 흑인이나 이민자들과는 달리, 무거운 청소기를 다루는 방청소에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사코 고집했다. 일 주일 한 번 방청소에 한 시간, 시장가고 빨래하는 일까지 합치면 네 시간 배당인 것을 설명하고, 방청소만으로는 일할 사람 구하기가 힘든 실정을 지적해 주곤 했다. 혼자 사는 살림에 간단한 장보기와 힘 안 드는 기계 빨래를 왜 남에게 시키겠느냐고 반문하는 백인 케이스를 위해서는 속수무책인 공통의 애로가 있었다.
한인으로는 늙은 아버지가 노망(?)했다며 신청을 해서 가정방문을 나간 일이 있다. 아버지가 대소변을 아무 데나 보고, 또 요리를 하면서 음식을 태우고, 차들이 복잡한 길거리에 나가 밤낮없이 서성이는 등, 누가 지켜 돌보지 않으면 화재나 교통사고가 날 형편이라고 했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딸이 휴학을 하고 아버지 집에 와 있었고, 대학 기숙사에 거하는 아들은 매일 잠시 집에 들러 아버지 감독을 동생과 교대했다. 아버지의 노인 복지금만으로는 무직자인 딸의 생계가 어려웠다.
24시간 감독이 인정되면 가사 보조의 최다 시간 할당에 따르는 임금이 당시 천 불 넘게 지급되었다. 한 개인을 위한 가사 보조의 급료가 천 불이 넘더라도, 국가 차원에서는 그를 양로원에 보내는 것보다는 경비를 절약하는 셈이고, 또 개인에게 사생활과 가족과의 유대관계를 유지하게 하면서 보조인에게는 임금을 지급해 국민의 실업율을 낮추는, 일거양득의 정책을 동시에 시행하게 된다.
밸리 지역의 중동인과 알미니안 중에는 정부의 이런 철학과 정책을 악용하는 사례가 그당시 꽤나 많았다. 가정방문을 가면 으레 머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소파에 누워서는 방청소도, 장보기도, 빨래도, 요리도, 목욕도, 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다고 떼를 썼다. 무직인 가족이나 친척을 고용해 많은 시간 배정의 수입을 올리려는 계산에서였다. 신청자 본인은 대개가 이미 노인 복지금을 받고 있어서 재정 심사는 생략하고 의사의 진단을 참조해 가사 보조 시간을 결정했는데, 같은 종족의 의사들이 환자의 ‘특별’ 부탁을 받고 진단서를 보내오는 터여서 소셜워커들은 때에 따라서는 계략을 써야 했다. 면담 중에 약병들을 보여달라는 식의 요구를 해서 누워있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일으켰고, 얼마나 걷고 활동할 수 있는지를 관찰했다. 그들의 기동 능력을 보는대로 세밀하게 기록하는 방법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예약 없이 방문을 해서 신청자가 아무 어려움 없이 집안 일을 씩씩하게 하고 있는 현장을 보기도 했다. 계략에 걸리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던 그들의 말이 다 엄살이었음이 밝혀졌다.
중동의 전쟁이나 러시아의 정치적 탄압 때문에 ‘폐인’이 되었다는 케이스에 최다의 보조시간을 배정할 것인가에 소셜워커들은 늘 고심했다. 20대 젊은 아들이 담배를 피우고는 꽁초를 아무 데나 버려 불이 날 뻔 했다며 24시간 감독을 한다는 어머니가 이란의 전쟁을 탓했다. 고향에 두고 온 자식을 못 잊어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이 미국 정부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내게 삿대질을 하며 아내의 시중을 드는 24시간 수고의 댓가를 요구하던 알미니안 남편도 있었다. 고향에서라면 그들이 이같은 권리 주장을 그들 자신의 정부를 향해 감히 표현할 수 있기나 했을까.
떠돌이 집씨들의 집단 생활도 잊을 수 없는 면모이다. 집씨들은 친족끼리 결혼을 하기 때문에 장애인 자손들이 태어난다고 한다. 어릴 때 멀쩡했던 아이가 성인이 된 후 불현듯 정신장애자가 되기도 한단다. 정신장애자이더라도 결혼하고 출산하는 일에는 아무 결함이 없기 때문에 가족수가 계속 늘고 있는데, 정상인인 가족원 몇 명이 대식구들을 나누어 보살피고 감독하였다. 노인, 장애자, 아동의 복지금과 가사 보조의 급료를 합하면 그런대로 걱정없이 살만한 수입이 되었다.
대가족 캠보디아 신청자를 방문했을 때는 식구마다 웰페어를 받으면서도 초라하게 사는 것이 의아했었다. 부모, 아들, 손자 세 세대의 7식구가 침실이 하나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집씨 집단처럼 그 가정도 복지금을 다 합하면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거실에 커튼을 쳐 방을 나누어 쓰면서 방바닥에 그릇을 놓고 앉아 식사하는 피난살이(?)를 미국에 와서까지 계속하고 있었다. 그 형편없는 살림에 대한 동료들의 해석인즉, 보나마나 피난오지 못하고 캠보디아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복지금의 반 이상을 송금할 것이란다. 그 이상의 평을 공석에서 삼가는 미국인 동료들이 사실은 화나고 서글퍼하는 속마음을 나라고 모를 리 없다.
특별히 새로웠던 경험은 당시 사회에 표면화되기 시작한 에이즈 환자들을 방문한 일이다. 밸리 지역에 있는 하스피스에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마지막 몇 주간만이라도 인간 대접받으며 편안히 지날수 있도록, 봉사자들이 매일 서너 명씩 순번제로 24시간 간호를 했다. 하스피스는 침실 셋이 있는 작은 개인 주택이었다. 방마다 거실에까지 침대를 둘셋씩 들여놓고 자원봉사자들이 식사며 목욕, 대소변까지 다 거들고, 가사 보조로 지급받는 급료를 하스피스 운영에 보태고 있었다. 의식이 몽롱한 환자들이 매일같이 배설하는 빨래감을 손수 만지면서도 봉사자들은 늘 웃는 얼굴이었고, 내가 갈 때마다 집안은 그들의 콧노래와 활기로 넘쳐 흘렀다.
새 케이스를 접수받고 하스피스를 방문할 때면 거기서 얼마 전에 본 사람은 이미 죽어 침대를 비우곤 했다. 하루는 젊은 여인이 이외로 의식이 또렷하기에 잠시 틈을 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잡고 어떻게 이런 젊은 나이에 하스피스에 들어 올 정도가 되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물 아홉이 젊은 것도 아니라고 입가에 순진한 미소를 짓고는, 사춘기에 계부의 성폭행을 참지 못해 가출한 것이 결국 거리의 여자가 되었고 마약에 손을 댄 시초였다고 했다. 매춘, 마약, 에이즈의 비참한 현실 뒷전에 가정 불행이 불씨였음을 얘기 들으며, 짧게 살고 가는 여인의 목숨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에이즈 환자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웨스트 엘에이에 사는40대 초반의 곱슬머리 남자였다. 자신의 말로 그는 한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니스 국가선수’였다고 한다. 워낙 테니스장에서 그를 에워싼 모든 것, 아주 작은 소음까지도 철저히 차단해 왔던 집중과 고독에 익숙해져서, 이제 자기 홀로 고독하게 죽을 일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는 돈 많고 화려했던 시절 무절제하게 상대해 온 여자들에게 에이즈를 전염시켰을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나는대로 한 사람씩 전화를 걸어 에이즈 소식을 알리고 용서를 빌고 있는데, 한때 친했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지옥에 가라!”고 그를 저주한단다. 그는 문화와 종교와 죽음에 관한 생각을 나에게 길게 얘기하면서 생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승화시키는 것 같았다.
다이빙을 하다 목뼈를 다쳐 신체가 마비된 20대의 청년을 대학 기숙사로 찾아간 일이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일단 도움을 받아 아침에 휠체어에 앉으면 휠체어가 전력의 힘으로 그의 발이 되어 주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빨대가 꽂힌 물컵이 방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가 하면, 전등도 가까이 가면 저절로 켜지는 램프였다. 손바닥을 붕대로 감아 그 사이에 펜을 끼워 천천히 그림 그리듯 서류에 서명을 하였다. 그는 심리학 전공으로 일 년 후 졸업하면 저능아들을 교육하겠단다. 그의 임상 실습 대상인 저능아들이 태반은 부모가 자식을 원치 않아서 특수 기관에 버려졌다며 동정했다. 자신이 불행을 당하고도 절망하지 않고 불운의 사람을 도울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을 직접 보면서, 헬렌 켈러가 ‘장애가 불편하긴 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한 말을 실감했다. 매일 그에게 아무 이해타산 없이 봉사를 제공하고 있는 기숙사 방친구도 남달리 천사처럼 느껴져, 그날은 그들을 돕는 내 직무가 더 돗보이고 뜻있게 여겨졌다.
뇌성마비로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휠체어에 묶여 있는 16세의 소녀를 본 일도 있다. 면담을 끝내고 작별할 때, 어머니는 딸이 둥근 철사를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거기 달린 긴 꼬챙이로 컴퓨터를 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청강사로 다니며 신체장애자들에게 용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얘기를 했다. 외양만을 보고 소녀와의 면담은 생각지도 못한 채 부모만을 상대했던 내 의학적 무지가 소녀에게는 무례로 보였을 터,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소녀의 마음을 들어볼 기회를 영 놓치고 말았다.
원망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세월을 견디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나는 늘 감동했었다. 그들은 역경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순박한 의지와 생에 대한 주인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들 대중의 인품과 가치관은, 일부 이민자들이 세상을 탓하며 방관자의 심리로 사회복지 제도를 악용하는 것과 비교할 때, 긍정과 부정의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제도의 모순을 개선해 악용되는 허점을 막는 한편,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켜주는 긍정적인 정책을 고수했다.
정부의 사려와 국민의 신뢰가 제대로 맞물리기에 결국 이 나라가 그 뿌리에 상당한 저력을 지닐 수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 저력 때문에 미국이 나같은 이민 초년생에게도 고용의 균등한 기회를 주었고,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수많은 노인 이민자들에게도 차별없이 복지금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의 보이지 않는 원천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신념을 가지고 내 직무 수행에 더 정진하며 겸손할 수 있었다. 내 삶의 의미와 사명이 늘 새로웠고 고마웠다.
공무원 생활 21 년은 나에게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특히5천여 명의 노인과 장애인을 면담한 후반의 12 년은 나로 하여금 이국의 땅에서도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계관을 터득하게 했고, 주인의식에 연루되는 갖가지 형태의 생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도 알게 했다.
엘에이 카운티는1992년에 상당한 규모로 예산을 삭감했다. 그 대응책으로 20년 경력에 50세 이상인 고액 연봉자 소셜워커들에게 5만불 은퇴 보너스를 주는 방안을 내 놓았다. 나는 그해 년말에 쾌히 자원하여 퇴직을 했고 또 꿈에 그리던 학교공부도 몇 년 했다. 공기 좋고 아름다운 몬트레이 바다 도시로 이사가서 자연을 즐기며, 이번에는 국방부의 공무원으로 10 년동안 가르치는 생활을 했다. 2005년 7월부터는 은퇴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평안히 걷고 있다.
# 입상 소감 - 두번째 소재로 글 쓸 용기가
할머니 머리칼이 왜 남들과는 달리 하얀색인지 4살인 손녀는 궁굼해 한다. 잊어버리기 잘하고 나다니기 싫어하고 변화를 꺼리는 칠순의 나이인데, 훗날 손녀가 지금의 이 늙은 모습만 기억할 것을 생각하면 많이 서운하고 허전하다.
흔적없이 가버린 내 세월을 돌이켜 보여줄 수는 없을까.
이민의 꿈과 그 실현, 일과 삶에 대한 사랑, 관계에 얽힌 사연들을 대충이라도 정리해서 죽기 전에 CD에 담아 남겨야겠다는 계획을 년초에 세웠었다.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을 첫 번째 소재로 정하고도 글을 쓸 엄두가 안 나 뜸만 들이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일보의 문예공모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응모할 목표를 겸하니 펜을 손에 잡은 한 달이 신나게도 빨리 지나갔다. 자신의 역사에 몰입하는 회상은 물론, 글을 쓰며 고치고 또 고치는 밤샘까지도 즐겼다.
일기나 편지 외에는 글 경험이 별로 없는 내게 이번 입선은 대단한 의미를 준다. 계획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로 알고 두 번째 소재를 쓸 용기를 낸다. 손녀에게 덤으로 보태주는 내 이야기가 공연한 허세나 욕심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황명숙
부족한 글을 가작으로 뽑아준 심사위원과 내 수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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