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거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한마디로 롤러코스터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끔은 종잡기 힘들 정도로 들쭉날쭉하는 그의 투구 내용과 비슷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들 하는데 박찬호에게 이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가 사상 첫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된 것부터가 그렇다.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찬호는 한국 프로야구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그의 지명권을 가진 팀은 충청도를 연고로 한 한화였다. 그런데 계약금에서 박찬호와 한화는 이견을 보였다. 한화는 2,000만원을 제시하고 박찬호는 2,500만원을 요구했다. 단 500만원 차이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즈음 청소년대회에서 박찬호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LA 다저스가 박찬호를 전격 스카웃했다. 그러면서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1991년 이었다.
가정이지만 만약 박찬호가 한국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면 어떤 투수가 됐을까. 박찬호의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정교하지 못하다. 이런 투수는 세밀한 야구를 지향하는 한국이나 일본 야구에서는 통하기 힘들다. 또 한국 프로의 경우 선수가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키우는 풍토가 아니다. 당장의 성적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미국에 건너 올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미국식 조련 시스템에 의해 그는 좋은 투수로 키워질 수 있었고 그의 활약은 개인적 성취의 차원을 넘어 국민적 자랑이 됐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그가 거둔 성적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이었다. 그가 2001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수천만달러의 다년계약을 했을 때 그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과 성적 부진으로 레인저스 시절의 박찬호는 극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먹튀’라는 팬들과 구단의 따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든 수모였다. 당시 박찬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글을 올려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하루에 수십번씩 재기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그때마다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대답해 보지만 때로는 그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며 고단한 마음을 드러냈다.
박찬호는 텍사스를 떠난 후 여러 팀을 전전하며 몸과 마음을 담금질 한 끝에 지난해 재기에 성공했다. 다저스에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54경기에 나와 4승4패, 2세이브에 자책점 3.40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완벽한 부활을 알리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박찬호는 월드챔피언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하고 6일 공식 입단했다. 그의 필리스 입단은 가까이서 그를 보기 원하는 LA 한인 야구팬에게는 실망스런 일이겠지만 박찬호의 야구 인생을 위해서는 현명한 선택이다. 경쟁을 거쳐야 하겠지만 일단 선발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도 팀 전력이 뛰어나다. 팀 전력이 좋다는 것은 같은 투구내용으로도 더 많은 승수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필리스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터런 박찬호를 무색케 하는 진짜 노장이 버티고 있다. 46세의 나이에 지난 시즌 16승7패를 거둔 제이미 모이어다. 박찬호 역시 노장이라지만 모이어의 노련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느낌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올해가 바로 소의 해이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1973년생으로 소띠이다. 황소걸음처럼 서두르지 않는 진중함과 성숙함으로 200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어 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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