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웬호 리’(Wen Ho Lee) 사건이 있었다. 대만 출신의 웬호 리 박사는 뉴멕시코주에 있는 미국 핵무기 연구 개발의 산실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의 중국계 핵과학자였다. 그는 1999년 핵무기 관련 기술 자료를 빼내 중국에 넘겼다는 의심을 받고 총 59개 죄목으로 기소돼 9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후 거의 다 무혐의로 밝혀졌고 연방 정부는 결국 사과와 함께 수백만달러의 보상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요즘 이 ‘웬호 리’ 사건을 새삼 떠올리며 분개하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나오고 있다. 출범을 앞둔 오바마 행정부의 상무장관으로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가 지명되면서다. 이들은 리처드슨 주지사의 ‘웬호 리’ 사건 책임론을 거론하며 장관 지명 반대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당시 에너지부 장관이었던 리처드슨이 웬호 리 박사의 신상 정보를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려 스파이 이미지를 덧칠하는데 앞장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특히 ‘웬호 리’ 사건을 겪으며 미국에 쉽게 등 돌릴 수 있는 배신자 집단으로 싸잡아 매도되는 것을 우려했던 중국계 미국인들의 리처드슨에 대한 반감이 큰 모양이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까지 공개 사과를 한 마당에 리처드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조차 거부했다며 분개하는 이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는 다시 이 사건을 끄집어 내 이슈를 만드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리처드슨 주지사가 히스패닉계의 대표주자격으로 각료 지명을 받은 상황에서 마치 아시아계가 히스패닉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비춰진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거라는 논리다.
사실 리처드슨 지명자가 포함된 이번 오바마 당선자의 조각 내용은 크게 봐서 아시안 아메리칸들에게도 크게 고무적인 선택임에 틀림없다. 미국 최초의 소수계 대통령 시대에 걸맞게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각료들이 배치된 가운데 아시안도 2명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육군 참모총장 출신의 일본계 에릭 신세키 보훈장관 지명자와 중국계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추 에너지장관 지명자는 인종 안배 차원을 넘어 충분한 자격과 실력을 갖춘 인사로 손색이 없다. 한인 커뮤니티도 역량 있는 인재풀을 꾸준히 키워나간다면 언젠가는 미국에서 한국계 장관이 배출될 날도 오리라는 희망도 갖게 된다.
그러나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리처드슨 장관 지명자를 둘러싸고 일고 있는 논란은 소수계로서 정치적 목소리 관철도 중요하지만 타 커뮤니티와의 소모적인 대립보다는 협력과 포용으로 정치적 자산을 축적해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도 시사해준다.
또 미국에서 한국계 장관이 나오고 나아가 대통령까지 배출할 수 있는 날을 앞당기기 위한 토양은 결국 한인 풀뿌리 유권자 하나하나의 적극적 참여와 관심이 만들어낸다는 것도 역사적인 오바마 정부 출범을 보며 기억해야 할 점일 것이다.
김종하
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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