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미국에 항복한 일본 열도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도쿄는 거듭된 공습으로 초토화됐고 인류 역사상 처음 원자탄을 맞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도심에는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일본은 경제를 일으켰다.
일본인의 타고난 근면함에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00년 가까이 쌓아온 기술, 공산주의의 득세를 막기 위해 일본을 반공기지로 삼으려는 미국의 지원, 거기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 1960년대에는 월남전 바람을 타고 분 전쟁 특수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도 수출로 거뜬히 극복하고 80년대에는 그 돈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일본 부동산과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고 일본과 세계 모두 ‘일본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본의 경영 기법과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는 책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 황궁의 부동산 가격이 가주 전체와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다. 1989년 니케이 지수가 전통적인 경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40,000대에 육박하자 ‘일본의 특수성’을 내세워 ‘그래도 일본 주식은 싸다’는 주장이 지면을 메웠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대형 경기’는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를 0%로 내리고 정부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다리를 놓는 등 갖가지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한동안 회복되는 듯하다가는 다시 나빠지고 다시 좀 좋아지는 듯 하다가는 또 악화되는 사태가 반복됐다. 지난 달 니케이 지수는 7,000선 밑으로 주저앉았다. 25년 전 수준이다.
일본 경기 침체가 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국의 전문가들은 여러 분석과 처방을 내놓았다. 미국과는 달리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관치 행정이 근본적인 문제며 부실 은행이나 기업은 구제하지 말고 도산하게 놔둬야 부실 채권이 정리돼 길게 보면 튼튼한 도약의 발판이 마련된다는 이야기였다. 경제성이 없는 정부 주도 건설은 재정 적자만 악화시킬 뿐 실질적인 경제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일본과 달리 시장 중심의 미국식 경제 체제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부동산 버블 붕괴로 시작된 금융 위기가 주가 폭락과 함께 실물 경제로 옮겨 붙으며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인 지금 미국에서 이런 소리는 이제 들어보기 힘들다. 오히려 ‘요즘 같은 비상 시국에는 비상 조치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함성만 울려 퍼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24일 팀 가이스너 뉴욕 연방 은행 총재를 재무장관에,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를 국가 경제 위원장, 대공황 전문가인 크리스티나 로머 UC 버클리 교수를 대통령의 경제 고문인 국가 경제 자문위 의장에 내정했다. 모두 학계와 관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로 인선 소식과 함께 다우존스 산업 지수는 21일 500 포인트, 24일 400 포인트 가까이 폭등했다. 오바마는 이미 통과된 7,000억 달러의 구제 금융안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은 물론 취임 직후 5,000억 달러 이상의 경기 부양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는 논쟁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론이야 어찌됐든 “정부는 뭐하고 있느냐”는 여론의 압력에 버틸 수 있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없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미국이 그랬고 1990년 이후 일본이 그랬다.
‘변화’를 기치로 내걸고 당선된 오바마는 취임 직후부터 사상 최대 버블이 터진 뒤처리를 해야 하는 엄청난 짐을 지게 됐다. 과거 미국과 일본의 예를 보면 아무리 정부가 애를 써도 버블 붕괴의 후유증은 오래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바마 팀이 잘 해나가기를 빌어야겠지만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성급한 기대가 아니라 긴 인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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