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운동화’에 얽힌 사연이 있다. 20년쯤 전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해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선 유명브랜드 N사의 운동화가 인기였다. 며칠 동안 어머니를 졸라 2만원짜리 운동화가 한 켤레 생겼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N사 제품이 아니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버지는 새 운동화를 자랑하는 딸에게 크게 화를 내셨다. 때가 어느 때인데 2만원짜리 운동화를 샀느냐고. 수해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돈을 그렇게 밖에 쓸 줄 모르냐고.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냐고.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모녀가 ‘세트’로 혼쭐이 났다.
너무 억울했다. 가장 비싼 N사 운동화가 아니라고, 아이들은 더 비싼 신발을 신는다고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실망했다” 라고 말씀하시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오랫동안 그때 그 순간이 억울했다. 늘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아이들은 더 비싼 것도 신는데…”
세월이 흘렀다. 기자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각종 취재를 하고 있다. 지난 가을 한 편모 셸터를 취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히터가 고장 나서 어린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 재활센터도 별반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바람을 막기 위해 깨진 유리창에 비닐봉투를 붙여 놓은 모습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경제상황 악화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타운 인근 한인 노숙자 재활센터에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한인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 몸과 마음이 추운 이웃들은 늘어만 가고 있다.
비로소 이해가 됐다. 만약 내게도 딸이 있고 어느 날 그 철없는 딸이 명품 브랜드의 운동화 자랑을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나 역시 아버지처럼 말했을 것이다. 불쌍한 이웃들의 아픔이 보이지 않느냐고. 돈을 그렇게 밖에 쓸 줄 모르냐고. 그렇게 배웠냐고. 실망했다고.
연말 송년회 시즌이 개막됐다. 풍성한 먹거리와 화려한 조명, 신나는 음악 속에서 웃음꽃이 활짝 피는 연말파티 분위기와는 반대로 우리 주위에선 소외된 이웃들이 외롭고 추운 연말을 보낼 것이다. 최고급 ‘운동화’를 신는 것도 좋지만 올해는 나의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불우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인 비영리단체 또는 선교회 대표들은 경기악화로 후원금이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도와주는 고마운 손길들이 있어 큰 힘이 난다고 한다. 이들이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는 2008년 겨울이 되었으면 한다.
김동희 사회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