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추운 보스턴 지역에서 봄 학기를 마치고 워싱턴 지역으로 편입학 해왔다. 나는 남쪽 출신이라 추위에 약하다. 춘천의 군 생활 때 나는 경기, 서울 태생 사람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을 알았다. 그해 여름 워싱턴에서 입사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내 이력서를 가진 총무과장이 동석했다. 미국 기업 근무, 유학생 신분인데 미국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는 첫 질문이었다. “미국 사람도 저와 같은 사람이다. 내 생각을 상식에 맞게 그들에게 말하면 미국인도 나를 이해하는 것을 듣고 배웠다”고 답변했다.
내 직장에 처음 왔던 맥도날드 영국계 부사장이 귀국하고 크레스 부사장이 감독으로 서울에 왔다. 곱슬머리의 유태계 후손이었다. 우리 회사는 구로공단 3지역에 미국인이 설계하고 미국 본사 기술자가 최종검사를 마친 최신식 건물이었다. 지하에 냉난방 시설을 갖추었고 1,200여 종업원이 일할 수 잇는 단층 건물이었다. 크레스는 겨드랑이 등에서 노린내를 풍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자기도 냄새 나는 것을 아니까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냉난방 팡팡 나오는 공장에서도 그가 지나가는 10m 이내에는 대단한 냄새가 진동했다.
추석연휴가 있은 후의 생산회의였다. 이틀을 쉬었으니 그 주의 작업일은 3일 반나절이었다. 우리는 그 주 계획량을 전량 생산하였고 일부 제품은 초과수출했다. 크레스 부사장이 ‘원더풀’을 연발하며 기뻐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민족은 부지런한 민족이다. 시작은 약간 더디지만 마음만 먹었다 하면 집중력이 대단하여 제시간에 마치려고 노력한다.
나는 컨트롤 데이터 코리아에서 배운 것이 많다. 미국인의 시장조사 능력과 생산계획이었다. 그들은 미 전역에서 주문생산을 받는다. 그리고 이 제품을 우리 서울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지 본사가 결정한다. 새 제품은 샘플 몇 개를 우선 만들고 테스트에 통과된 완제품을 미네소타 본사로 보낸다. 본사 시험실에서 다시 통과되면 대량생산 오더가 서울 공장에 떨어진다. 만약 우리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생산주문 오더가 홍콩 공장으로 갈 수도 있다. 하나의 완제품은 거의 일주일 단위로 노스웨스트 비행기를 타고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그때 나는 비행기 한번 못타본 촌놈이었다. 이 부품은 나보다 더 귀중한 팔자 좋은 놈이라고 동료들끼리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이 회사를 3년 반 다녔다. 근무시간도 좋고 보너스 연간 400%, 6개월마다 봉급 인상, 의료보험 등 국내 어느 대회사보다 대우가 좋았다. 더구나 오후 4시에 관광버스로 퇴근시키니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보니 시절을 잘못 만나 도시산업노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에 위치한 미국, 일본 기업들은 들불처럼 번지는 금속노조 운동에 생산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본사는 고객과의 약속 때문에 한국의 노조 움직임에 안달했다. 서서히 서울 공장의 주문량은 그 당시 노조운동이 없었던 홍콩 공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크레스 부사장은 생산계획 숫자는 약속, 즉 Commitment(금석맹약)라고 강조했다. 약속은 서로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정상대 <훼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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