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칼럼
▶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금강산을 올랐다.
눈으로 보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소리가 듣고 싶었다. 모양과 멋과 소리가 함께 감도는 민족의 명산 금강산은 역시 민족의 비원을 쓸어안고 있었다. 수 없는 봉우리들과 기괴하고도 청아한 빛깔과 모양을 뽐내는 바위와
제 맘대로 자란 송백이 절벽과 어울려 풍류처럼 다가선다. 물과 산머리를 넘어가는 백운, 동쪽계곡으로는 청풍 따라 흐르는 금강산 맑은 물에 심신을 담갔다.
떨어지면 폭포수요 흐르면 비단이요 흩어지면 백옥이요 멈추면 담수요 마시면 약수라 했던가. 춘원 이광수 선생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올라 웅대한 대자연과 숭엄한 모양에 탄복한 적이 있다. 동해가에 우뚝 서 있어 내금강의 모든 봉우리가 저 아래 마치 모형지도로 보이고 동으로는 창해가 바로 발 아래로 들어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읊었다.
비로봉 대자연을 /사람아 묻지 마소 /눈도 미처 못 보거니 /입이 능히
말할 손가 /비로봉 알려 하옵거든 /가보소서 하노라,
동쪽은 외금강, 중앙금강의 서쪽은 내금강, 해안은 해금강, 해금강 남쪽에 신금강으로 구별된 금강산은 옛 신라 때는 상악, 또는 풍악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1만 2천 봉이 순 암석이라서 계골 이라는 별호도 있었거니와 승려들이 불경의 설에 영향을 받아 금강산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통일된 내 땅을 밟는 것처럼 한껏 들떠있던 금강산 그 길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꽤나 그리웠던 우리네 땅이 아니었던가. 마치 어제 올랐던 그 길처럼 정감이 넘치건만 온정리 사람들은 달랐다. 어쩌면 금강산을 찾아간 사람들은 금강산 못지 않게 북녘동포들을 만나고 싶었을 게다.
온정리 사람들에게 남측사람들이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란 말인가? 사는 모습이 달라서일까? 남측과 북측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신작로를 걸어가는 온정리 사람들의 발걸음에 60년대 한국농촌의 발걸음이 보였다. 자전거 타고 가는 온정리 사람들은 영락없는 60년대 시골사람들이었다. 핏기 없는 인민군 소년병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평양교예단의
서커스를 보는 순간 눈시울을 삼키고 말았다. 그들이 애처로워서다.
북한 식당에서 저녁식사 하는 날 부족한 반찬을 주문해야 했다.
“접대원 동무, 여기 상치 좀 더 주세요.”
얼굴이 고운 접대원 동무는 대답한다.
“추가는 없습네다.”
아름답고 예쁘다고 칭찬해주어도 좋다 싫다 말이 없다. 그저 무표정이 표정이다.
해금강과 삼일포에서 마주친 안내원들도 한결같이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한 핏줄이라면 가벼운 정분을 나눌 만도 한데 정이 없어 보이는 건 이데올로기 탓 아니면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반감쯤으로 오해할 정도로 표정이나 몸짓이 굳어져 있었다. 과연 남과 북이 정 떨어질 대로 정이 떨어진 것일까
금강산 가는 길이 가벼웠건만 금강산 떠나는 길이 한없이 무거웠다.
우리의 소원은 한낱 꿈이었나. 그 땅이 내 땅이었건만 그 사람들은 내 사람들이 아니었다.
금강산 중턱에 걸린 흰구름이 무상하다. 아! 금강산.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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