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한현숙<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스토브에 올려 둔 주전자에서 나오는 물 끓는 소리인줄 알았다. 휘파람소리를 내는 그런 주전자를 생각하며 왜 이 집 안주인이 불을 끄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있던 중 갑자기 이것이 바람 소리구나 생각이 그제사 들었다. 새 동네라 바람 소리를 킬 나무도 별로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종종 걸음으로 유리창에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이었다. 아! 바람이 이렇게 불 수도 있구나. 바람이 하늘 위 꼭대기에서부터 땅 아래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마구 불고 있었다. 무엇이 저토록 바람을 휘둘리게 하는 것일까? 마치 동네 전체가 절규하듯 윙윙 소리지르고 있다.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며 바람을 따라 시선을 쫓다 보니 내 마음까지 그 바람이 들어와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바람 부는 날을 좋아한다. 특히 얼음장같이 맑은 겨울 하늘 아래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마치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인양 빨리 나가고 싶어 안절부절이다. 그렇다고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여름에도 전기 담요를 켜서 남편을 질리게 만들만큼 추위를 많이 탄다. 하지만 이렇게 바람 부는 날이면 무조건 뛰쳐나가 볼이 발갛게 익도록 이리 저리 걷고 싶다. 내 마음속의 불덩이가 드디어 사그라지고 하얗게 남은 재까지 모두 바람에 날려보낸 후 잠잠해질 때까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불은 바람이 불면 다시 타올라 지천명의 내 마음을 아직도 활활 타오르게 하고 설레게 만든다.
어려서부터 원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내온지라 우리집 식구들은 모르지만, 몇 안 되는 옛 친구 중의 하나는 바람 부는 아침에는 바쁜 와중에도 꼭 안부 전화를 한다. 그녀의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잠을 깨 설레는 마음을 꼭 여미고 있든 나는 그 전화를 받으면서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무안하기도 하고, 또한 나를 이해하는 친구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왠지 바람 부는 날을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 오래 전에 친한 친구에게만 살짝 내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평생 교육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정년 퇴직한 아버지로 인해 결혼 전 늘 집안에서 듣던 말 중의 하나가 여자는 고운 말씨를 골라서 조용히 나직이 말하라는 것이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제 멋대로 함부로 부는 바람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거칠고 상스러운 것으로 경계해야할 것으로 여겼다. 이것도 역시 한국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미국에 이민 와서 생활한 것이 강산이 변해도 세 번도 넘게 변한 세월이 지났건만, 어려서 받은 교육이 늘 내 사고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 문화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중언어자는 이중 문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넘나들며 고민하다 보니 더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겠구나 스스로 자문해 본다.
허공에서 연줄 끊긴 연같이 방황하던 시절이 짧게 혹은 길게 이민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늦은 봄 민들레 하얀 씨 같이, 가을 단풍 마저 다 떨어진 나무에서 날리는 바람개비 씨 같이 바람을 따라 모두들 언어와 풍습이 다른 곳에 와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겨울 눈보라 바람에 밀려서이기도 하고, 살랑거리는 봄바람 탓도 있으리라. 여름 장대비를 동반한 바람일 수도 있고, 무언가 답답한 마음을 씻어주는 서늘한 가을 바람일 수도 있겠지. 그 바람으로 우리는 미지의 곳으로 옮겨와서 다인종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배운다. 단일 민족이라는 긍지는 가끔 한번씩 쳐다보는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 정도로 남겨 두고.
허나 나는 그 바람으로 인해 바쁘고 단조로운 생활 중에 잊고 있었든 설렘을 다시 맛본다. 어느 곳에서 이 바람이 여기까지 왔을까? 하늘을 올려 본다. 예측 할 수 없는 곳에서 오는 바람이기에 늘 새롭다. 내 가슴을 벅차게 하고 두근거리게 하는 바람이 오늘 나를 찾아왔다. 반갑다.
한현숙<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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