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세대 여성들은 이 시기 겪을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봉사와 취미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뻥 뚫린 가슴, 왜 살지?”
4050 남성들만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여성들은 남성들이 안고 있는 금전·건강 문제와 더불어 폐경과 갱년이라는 이중고까지 감당하느라 4050 홍역을 남성들보다 더 심하게 치러낸다.
이들은 이구동성 “이제 좀 먹고 살만해 한숨 돌리니까 남편이나 아이들 모두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내 존재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뿐인가. 건강은 예전만 못하고, 살아보니 ‘남보다 못한 존재’가 남편 같기도 하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퇴색해가고, 자녀들도 더 이상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더러 언어장벽으로 속 깊은 얘기도 힘들어진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자녀들 뒷바라지에서 해방돼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그도 잠깐, 결국 손에 남는 건 공허함과 허무함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시기 여성들 중 상당수가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호소하고, 이혼충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유혹에 흔들림 없고(불혹) 하늘의 뜻을 깨닫는(지천명) 나이어야만 한다고 4050세대를 밀어붙이기엔 행간의 숨은 뜻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바쁘게 사느라 숨돌릴 틈 없던 세월을 돌아보며 멈춰선 현실은 온통 유혹 투성이다. 제대로 살아온 것인가에 대한 자책과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자체가 유혹이다. 그뿐인가. 40대 돌연사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궁암과 유방암 등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늘의 뜻이 분명한 여성들만의 질병 역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불혹과 지천명이란 명제는 현대를 사는 4050세대들에겐 버겁다.
애들·남편이 무시
여성성은 시들고
상실감에 짜증만
부모 봉양도 여성들 몫
고민 나눌 친구도 없어
“가족의존 과감히 탈피
취미·운동 통해 극복을”
갱년과 폐경, 몸도 마음도 고달프다
갱년기와 폐경기에 접어든 여성들은 육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을 받는다. 폐경과 갱년기를 맞으면서 여성들은 자궁관련 질환이 늘어나고, 심혈관계 질환에, 골다공증, 요실금 등 크고작은 질병들에 시달린다. 그러나 육체적 질병보다 여성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폐경을 맞으면서 ‘여성으로서 끝’이라는 상실감이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 거기다 호르몬의 변화로 짜증이 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면서 대인관계도 힘들어 진다.
박상효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 시기에 맞는 정신적 변화들은 의사에 처방에 따른 호르몬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여기에 규칙적인 운동과 활발한 사회활동을 적절히 조화시키면 갱년기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는 뭔가, 상실의 세대
전업주부 정모(55)씨는 요즘 들어 부쩍 기운이 없고 만사가 귀찮다. 80년대 초반 가족과 이민 온 정씨는 다른 이민 1세들과 마찬가지로 갖은 고생 끝에 이제 좀 살만해져 한시름 돌렸다. 그러던 정씨는 지난해 막내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타주로 보낸 뒤 남편과 둘이 덩그러니 집에 남게 되면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정씨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자리잡은 남편과 달리 이제 아줌마로만 남은 내 인생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드니 우울증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하소연한다.
일하는 주부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LA 다운타운에서 작은 스낵샵을 운영하는 김모(49)씨는 “남편과 대화가 끊어진지 오래인데다 딸 아이와도 콩글리시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전부”라며 “가족들 모두가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나이가 들수록 위축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이런 상실감을 참고 사는 여성들도 많지만 요즘은 이런 사연들이 발전해 이혼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한인가정상담소 피터 장 소장은 “이시기 상담소를 찾는 여성의 40%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만큼 부부갈등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여성일수록 이혼 결정이 빠르다”고 말했다.
부모봉양도 100% 여성 몫
양가 부모중 부양문제가 대두되면 그 몫은 며느리든 딸이든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으로 떨어진다. 더욱이 부모가 치매나 암 등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경우 양로원이나 요양 시설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체면과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한인사회에서는 그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나 여자형제들에게 실질적인 부양책임이 떠맡겨진다.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살던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얼마 전 집으로 모시고 온 직장인 이모(50)씨. 이씨는 “맞벌이 부부여서 요양시설을 이용하자고 했지만 남편이 우겨서 모셔오긴 했으나 남편은 결국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고 뒷바라지는 온전히 내 몫”이라며 “직장생활하랴, 집안일 하랴 여기에 병간호까지 겹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고 털어놓는다.
서포트 그룹이 없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민사회에 우울증이나 불안요소들이 서포트 그룹(support group)이 없는 데서 찾는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 없는 상태에서 이국 땅에 오래살게 되면 자신을 붙들어주는 서포트 그룹이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함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장수경 임상심리학 박사는 “중년의 나이에 새로이 서포트 그룹을 만들기란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이때는 노년까지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을 시작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 적극 참석하는 것이 상실감과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조언했다.
춤으로 건강을 다지는 4050세대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이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기 위해선 규칙적인 운동이 최고라고 말한다.
‘여자’이고 싶은데‘아줌마’취급 속상해요
“하숙생같은 남편 믿느니
내 건강은 내가 챙기려
댄스 배우기 시작했죠”
17일 오후 8시 LA 한인타운의 한 댄스 스튜디오.
댄스클래스를 듣기 위해 스튜디오로 삼삼오오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밤늦은 클래스여서 그런지 20~30대들 틈바구니에 대여섯 명의 40대, 50대 중년 여성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지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당차고 씩씩해 보이는 말이지만 행간엔 엄마를, 아내를 챙겨주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서운한 속내가 살짝 엿보이는 순간이다.
“애들 다 커서 대학 갔지, 남편도 애틋하고 정답기보다는 하숙생같지, 주변을 보면 강도의 차이일뿐 우울증 없는 중년 여성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이들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심숙진·47)
이처럼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도 서운함이지만 이 나이 여성들의 가장 큰 적은 역시 갱년기와 폐경기.
“나이 들어도 여전히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거울 보면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지, 뱃살은 처지지, 기미에 검버섯까지… 거기다 갱년기 탓인지 만사가 심드렁하고 활동량이 줄면서 그 덕분에 살은 더 찌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성을 잃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면 아무도 나를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성별 구분이 없는 아줌마로 취급하죠. 그땐 겉으론 아닌 척해도 속으론 엄청 속상하고 우울하지 않겠어요?”(조이 조·54)
여기에 경제적 문제나 고부갈등, 부부갈등까지 겹치면 위기의 주부들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나이가 되면 문제없는 부부, 가정이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엔 이혼한 부부들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요즘은 겉으론 멀쩡하게 잘 지내온 부부들인 것 같은데도 이혼들을 해요. 더욱이 이민사회에서 여성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데다, 이곳에서 자란 2세들 역시 이혼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니까 이혼 결정을 하기가 더 쉬운 것 같아요.”(헬렌 한·49)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우울증에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규칙적인 운동이 너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별취재반>
안상호 부국장(특집1), 황성락 차장·이의헌 기자(사회), 황동휘 차장(국제), 정대용(경제)·박동준(특집1)·이주현 기자(특집2), 이승관 차장·신효섭·서준영 기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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