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현은 활짝 열린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마음이 저려왔다. 택시에서 내렸다. 희를 동아일보사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현이 미국에서 서울에 온지 만 이틀째다. 희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현이 투숙한 호텔로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사실 현은 희를 무척 보고 싶어했다. 옛 신문사 건물이 현의 뼈아픈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현과 희는 청계천 상가에서 자랐다. 두 집 모두 책방을 경영했다. 한 블록 걸러 점포를 두고 있던 부모들은 오랜 동안 불편한 사이가 됐고 둘이 초등학교를 함께 다녀도 절대로 서로서로 점포를 피해 갔었다.
부속중학교 때는 희가 현을 좋아했다. 현이 지은 글들이 항상 학예회에 뽑혔다. 희는 현이 쓴 ‘어여쁜 친구’가 바로 자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에 그려진 모습대로 모양을 내고 다녔다. 부속고등학교 때는 현이 희를 좋아했다. 희가 엘리자를 위한 곡을 경연대회에서 쳤을 때 현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빨간 장미를 희에게 안겨 주웠다. 대학 때는 둘이 기독방송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토요일 연습이 끝나면 덕수궁을 돌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헤어졌다. 그래도 청계천가를 걸어서 집에 가는 것을 서로 피했다.
졸업을 앞두고 희는 현에게 부모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한다고 했다. 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은 자신이 없었다. 현에게는 이미 군 영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희는 그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후 청계천가는 야단이 났다. 매일 같이 청계천 철거를 놓고 상인들과 시경은 실랑이를 했다. 현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가게를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갔고, 희의 아버지는 철거반대의 농성을 이끌었다.
현은 제대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현은 학위를 마치고 결혼도 않은 채 연구에 몰두했다. 현은 청계천에 얽힌 옛날을 기억하기도 싫었다. 무거운 시멘트 아래 숨겨진 도시의 폐수를. 희가 떠나간 아픔도 그 하천에 묻고 싶었다.
연일 한국신문에 보도되는 청계천 기사는 현에게 호기심과 야릇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싱싱한 물이 흐르는 것이 보고만 싶었다.
현은 암세포 유전학적 고찰과 치료 개념이라는 주제 발표를 위해 서울에 왔다. 그가 개발한 치료제를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가 나고 자란 청계천을 바라보고 싶었다.
희는 까만 고급승용차에서 내렸다. 머리에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희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 인사를 했다. 현은 말없이 신문사를 돌아 그 옛날처럼 청계천 입구에 섰다. 희를 뒤돌아 봤다. 희가 앞서서 청계천을 향해 걸었다. 희의 다리는 가늘고 창백했다. 아래로 보이는 물은 수천 마리의 은어가 앞을 다투어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현에게 일으켰다. 어린이들이 바지를 걷고 첨벙첨벙 소리를 내고 물을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다. 말없이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앞서 걷던 희가 쓰러지듯 몸을 현에게 기대왔다. 그의 털모자가 현의 어깨 위로 벗겨지고 희의 대머리가 환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현은 급히 희를 부축하여 도로변의 택시에 올랐다. 차는 메디칼센터 쪽으로 달렸다. 차창 밖으로 흰색 물결은 점점 짙은 검정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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