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기념비의 도시’라 불린다. 미국 역사를 상징하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도시 전체를 수놓고 있다. 그 중 으뜸은 도시 중심인 몰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링컨 기념관이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워싱턴 모뉴먼트를 반사하는 직사각형의 긴 풀 앞에 자리잡고 있는 이 기념관은 규모의 웅장함에 있어 다른 구조물을 압도한다.
건물 벽면에는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비롯 노예 해방 선언문, 대통령 재선 취임사 등 그가 행한 주요 연설문이 새겨져 있고 그 한 가운데 거대한 링컨 조각상이 마치 민주주의의 수호신인 양 근엄하게 앉아 연방 의사당을 지긋이 바라다보고 있다.
1863년 7월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에서 벌어진 사흘 간의 전투로 남 북군 합쳐 4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링컨은 그 해 11월 남북 전쟁 최대의 격전지인 이 전장 묘지 헌정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에는 당시 최고의 웅변가로 알려진 에드워드 에버렛도 참석, 2시간이 넘는 연설을 했다. 지금 에버렛이 한 얘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던 링컨의 예측과는 달리 2분 남짓한 그의 연설은 2,400년 전 아테네 페리클레스의 조사 이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our scores and seven years ago...’로 시작되는 이 연설문은 단순한 정치 연설이 아니라 미국이 지향하는 이상을 담은 산문시의 절정이다. 링컨은 이 짧은 조사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 이념의 실현을 위해 같은 배를 탄 동반자로 묶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의 희생 속에서 모두가 거듭나는 진리를 감동적으로 천명했다.
시작부터 ‘87년’이라고 하지 않고 ‘4번의 20년과 7년’으로 해 성경의 종교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 연설을 한 해가 1863년이니까 87년 전이면 1776년이다. 건국을 노예제를 합법화한 연방 헌법이 제정된 1787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건국이념을 선포한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1776년으로 잡은 것은 이 연설이 ‘제2의 건국 선언서’임을 말해준다.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이 낭독됐다. 죽은 자를 추모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이 연설이 무고한 시민과 타인을 구하려다 숱한 영령이 산화한 현장에서 울려 퍼진 것은 링컨의 말대로 ‘지극히 적절한 일’(all together fitting and proper)이다.
그들은 갔지만 남은 우리에게는 다시는 이 같은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무가 지워져 있다.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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