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모.윤치창.김형린 등 7인 주축
1960년 6월12일 뉴욕한인교회서 창립총회
학생그룹 지지받은 서상복 초대회장 선출
초대회장 서상복.
뉴욕에 제대로 된 조직과 체계를 갖춘 한인회가 공식 참립된 것은 1960년 6월12일의 일이다. 그보다 앞서 해방전후에 걸쳐 뉴욕에 몇차례 한인회라는 명칭을 붙인 단체들이 명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설립취지가 정치적이거나, 관 주도, 또는 조직및 체계가 부실해 오래 가지 못하고 소멸되는 현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24년 조직된 뉴욕 최초의 한인단체 뉴욕한인교민단은 이승만 노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해방후 1949년 뉴욕총영사관이 설립되고 나서 6.25 직후 남궁염 총영사가 회장을 겸임한 한인회가 조직되어 주로 영사관과 민간을 잇는 교량역할을 했다.
이듬해 부동산 업자 이원순이 회장을 이어받았고 52년에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 아나운서 민재호에게 넘겨졌다가 방송국이 워싱턴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53년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부임한 유창순이 후임을 맡았다. 1년후 총영사관 최용진 영사에게 바통을 넘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이른바 관제성격의 한인회가 5-6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그 역할은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두뇌유출을 방지한다는 정책에 따라 유학생들에게 고답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유학생 사회의 원성을 샀다.
그러다가 1960년 국내에서 4.19학생 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그 바람이 뉴욕에 불었다. 이때 불만이 고조된 학생그룹이 총영사관 앞에 모여 본국 학생들의 희생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부 동포들이 호응하는 기색을 보였고 이를 계기로 한인들의 결속의지가 집약되어 나타났다. 한인들도 이제는 단합된 힘을 보일 때가 되었다는 취지로 1960년 5월1일 뉴욕한인회 재건발기회를 소집하게 된것이다. 이때 뉴욕한인회 재건준비회, 또는 한인회 재조직을 위한 발기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은 이미 전에도 그와같은 한인회 성격을 지닌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기 준비를 위한 5월1일의 모임은 맨하탄 115가 소재 뉴욕한인교회에서 소집됐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한인 유지들은 강한모, 윤치창, 김형린, 서상복, 홍윤식, 송현구, 김준성등 7명이었다. 당시 고교 교사로 재직중인 강한모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발기회에서 결의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았다. 1.뉴욕한인회를 재조직할것, 2.회의 목적은 상호간의 친목과 연락을 도모하여 한인생활
의 복리를 증진하고 뉴욕한인 대다수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이 됨을 목적할것, 3.뉴욕한인회의 지역범위는 뉴욕시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다른 주도 포함할것, 4.회원의 자격은 한민족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수 있도록 할것, 즉 법률이나 신체의 외적 구별에 의하지 않고 협동을 중요사하고 정신적 내적 본질에 기준할것등 골격을 세우고 나머지 제반업무는 강한모, 송현구, 김중성등 3인에게 위임했다.
이들에 의해 뉴욕한인회 규칙초안이 5월8일 마련되고 5월22일 소집된 준비위원회에는 모두 23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는 강한모, 김계봉, 김애경, 김매리앙, 김배세, 한영교, 서상복, 윤치창, 전화영, 김형린, 이병두, 김인형, 송현구, 임순만 부부, 최성학, 안경진, 김경선, 이은우, 이범선, 이덕호, 김준성 등이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이날 준비위원회에서는 한인회 설립에 관한 제반사항들에 대해 충분한 의견교환이 있었고 규칙심사는 강한모, 윤치창, 한영교, 전화영, 김배세, 송현구, 김준성등 7인 심사위원회에 일임하면서 뉴욕한인회 창립총회를 6월12일 뉴욕한인교회에서 정식 소집할것을 결의했다.
발기 준비 모임, 규칙 초안 마련, 준비위원회등을 거치면서 불과 한달여만에 소집된 창립총회는 6월12일 일요일 오후3시 뉴욕한인교회에서 4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발기인들과 준비위원 대부분이 참석했고 유학생회의 젊은 멤버들도 합류했다. 강한모의 사회와 김승만의 지휘로 참석자들은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 그간의 준비과정을 김준성이 보고했고 이어 임시의장에 서상복, 서기에 김준성이 선출됐다. 이어 2시간에 걸친 규칙 수정을 끝내고 이날 총회는 채택된 규칙에 따라 임원 선거에 들어갔다. 먼저 실행위원들을 뽑고 여기서 선출된 실행위원들이 회장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다수 득표순으로 뽑은 실행위원 선거에서 윤치창(19표), 강한모(18), 김일평(17), 김준성(14), 김배세(13), 호기성(13), 김형린(12), 이범선(12), 노재봉(12), 한영교(11), 손재승(10) 순으로 11명이 선출됐다. 이어 실행위원들에 의해 실시된 회장 선거에서는 서상복 8표, 강한모 6표, 김형린 5표로 학생그룹의 지지를 받은 서상복이 초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됐다.
회장 선거와 함께 이날 총회에서 채택된 뉴욕한인회 규칙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회장 임기는 1년으로 하되 재선할수 있다. 2.회장은 총회에서 선출하고 부회장, 총무, 서기및 회계는 실행위원회에서 실행위원 중에서 선임함을 원칙으로 한다. 3.정기총회는 매년 12월말에 회장이 소집한다. 4.중요사건 발생시 회장이나 실행위원회가 임시총회를 소집하되 정회원 20명의 서명
으로도 소집할수 있다. 5.뉴욕한인회는 사업성질에 의하여 뉴욕한인학생회나 기타 각 한인단체들과 밀접한 연락을 취한다.
이렇게 창립된 뉴욕한인회는 오늘날까지 50년이란 세월동안 몇단계의 시기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초창기 친목시기(1960년-65년)를 지나 해방후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뤘던 시기(66년-78년), 새로운 이민물결 시기(78년-2000년)를 보내고 정착시기(2000년 이후)로 접어들었다. 그간 31대에 걸쳐 뉴욕한인회를 이끈 주역, 역대 회장들은 서상복, 강한모, 김형린, 송안나, 한영교, 이범
선, 김판기, 장용호, 남병학, 손재룡, 조시학, 김정원, 김상수, 김정희, 이성종, 박지원, 강익조, 조병창, 이문성, 변종덕, 김재택, 주명룡, 이정화, 신만우, 이세종, 김석주, 김기철, 이경로, 이세목, 하용화에 이르고 있다. 뉴욕한인회는 내년으로 창립 반세기, 50주년이라는 중요한 시점을 맞고
있다.
1963년 뉴욕한인회와 총영사관이 함께 주최한 광복절 행사
<뉴욕한인회의 창립정신>
뉴욕한인회는 한국의 4.19 혁명을 계기로 탄생했다. 당시 기성 원로그룹과 유학생들이 모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뜻을 합쳐 건설한 이민 커뮤니티였다. 이때의 한인회 창립정신은 자유민주주의 신봉, 세대간 융화, 독립정신과 개척정신의 계승발전, 그리고 관민친선을 실천하는 정신이었다. 해방전부터 미대륙에 거주하면서 터득한 원로그룹의 독립정신과 개척정신을 신참 학생들이 전수받고 융화된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것이 뉴욕한인회의 창립정신이었다. 이에못지 않게 중요한 또하나의 정신은 관민친선이었다. 창립후 한번도 빠지지 않고 광복절, 3.1절 기념행사를 뉴욕한인회와 뉴욕총영사관이 공동주최하는 전통을 만들어 모국과 뉴욕한인사회를 잇는 끈끈한 유대로 활용해 왔다. 이와같은 뉴욕한인회의 창립정신은 그대로 이어갈 경우 하나도 버릴것이 없는 훌륭한 유산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것고 다. alrnr tnsghl wsjtlghl 이제까지 50년간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뉴욕한인회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인 위원회가 마련한 뉴욕한인회 규칙 초안.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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