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부활절을 맞았다. 당연히 부활절은 무한 기쁨과 감사의 날이지만, 올해는 왠지 좀 어둑하고 묵직한 기쁨이다. 화창한 봄이 왔지만 아직 봄이 아닌 것 같다는 ‘춘래춘(春來春)불사춘(不似春)’의 마음이다. 왜 그럴까?
요즘,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평화’(平和)에서 오는 당혹감 때문이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평화를 보면서도, 마치 마른 북어처럼 별반응없이 무감(無感)해 하는 세태에서 오는 당혹감이다.
당혹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가벼운 당혹이 있다. 전시회에서 그린이의 난해한 그림이나 구상(具象)의 의미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예술적 비약을 담은 추상화 앞에 설 때 당혹감을 느낀다. 음악회에서 다들 대단한 연주라고 하는데, 쉽게 공감이 안가서 내심 당혹한 적도 있다. 모름이나 안목 부족에서 오는 당혹감이다. 이런 당혹이야 문화적 소양을 기르면 이내 사라질 가벼운 당혹감이다.
요즘 느끼는 당혹감은 그런 당혹감이 아니다. 어둡고 무겁고 정말 당혹스런 그런 당혹감이다.
교회에서 조차 이념과 진영(陣營)논리에 매몰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몰각(沒却)하고,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때 당혹감을 느낀다. 전쟁으로 다치고 죽어가는 사망자와 그 가족들의 슬픔이나 고귀한 생명의 희생에 대한 애도와 걱정보다, 자신의 주식 떨어지는 것을 더 우선하여 더 무겁게 걱정하는 것을 보는 일 역시 당혹스럽다.
짓밟히고 깨어지는 ‘평화’에 대하여 점점 무감(無感)해지는 세태(世態)를 볼 때 느끼는 당혹감은 실로 무겁고 어둡다. 총기폭력으로 교실의 평화가 깨질 때, 제도적 폭력이나 공권력 남용으로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삶이 침해를 당할 때,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 소수자의 기본적인 삶과 최소한의 평화가 무너져 내릴 때 요즘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이 만든 최첨단 발명품들(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살리기는 커녕 죽이는 살상무기가 되어)에 의하여 소중한 생명들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고, 사회인프라의 파괴 등으로 평화가 짓밟히고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볼 때에 당혹하다. 한 나라와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일구어 온 문명을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는 말은 평화에 대한 진멸(盡滅)이요, 인류와 역사에 대한 부정이다. 종교인이요, 성공회의 사제로 당혹감에, 생각이 정지되고 몸이 떨린다. 그럼에도 짓밟힌 평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극소수의 ‘시대의 의인(義人)’들의 소리만이 애처롭게 들릴 뿐, 세상은 대체로 무감하고 멀뚱하다.
무너져 내리는 평화를 보면서도 무감(無感)한 모습은, 마치 한 시인이 노래한, 어느 가게의 마른 북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최승호, 북어) 시인은 마른 북어의 커다란 입은 평화가 무너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마른 막대기처럼 무감하고 행동 없는 우리를 향한 ‘너도 (나와 별 다르지 않은) 북어지? 북어지?” 재우쳐 외치는 부르짖음이라고 말한다.
당혹을 넘어 짓밟힌 평화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짓밝히는 평화를 보며 애타게 발 동동 구르고, 기도하고, 너나 없이 연대해야 한다. 지난 3월 타계(他界)한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벌써 몹시 그립다. 그는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세계의 평화가 깨질 때, 자크 데리다나 움베르토 에코 등 많은 학자들과 비판적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전쟁 반대 공동성명서를 내고 깨져가는 평화를 지키려 하였다.
짓밟히고 외면되어 가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평화의 길’이 인류가 가야 할 ‘그 길’(The Way)임을 보여주셨다. 당혹감을 떨치고 평화의 일꾼이 되어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평화,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요, 모두가 함께 고르게 사는 길이다. 평화, 오늘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지구별 인류의 미래를 살리는 영원한 시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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