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집안을 정리하고, 쓸고 닦은 지 이틀째. 겨우 봐 줄만 하다. 퇴직 후 한국을 오가며 살다 보니, 늘 떠 있는 듯한 생활. 오면 갈 준비, 가면 올 준비를 한다. 꼬박 5년째. 여독이나 시차 적응 같은 단어는 잊고 살았다. 도착하면 바로 집안을 정리하고 치우고, 도착 하는 날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몸을 부려야 빨리 적응이 된다는 이유를 대지만 신통하게도 몸 상태가 아직은 나쁘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이번엔 미국에 좀 오래 있어볼 예정이다. 주부가 부재 중인 살림살이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곳곳에 쌓여 진 물건들. 버려야 할 것들이 쌓여 있고 빈 박스들이 장식품인양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다 발견한 아직 박스도 뜯지 않은 주방 기구들. 다양하다. 혼자 있던 남편이 편해보려고 사다 놓았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언박싱. 그러다 손마디가 뻐근하여 커피 한잔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눈에 띤 어수선한 책장. 이사를 와 다시 책을 정리하며 시집은 따로 모아 두었지만 수필과 소설은 뒤섞여 있었다. 분리를 해야 쉽게 볼 수 있을텐데 차일 피일 미루었다.
오늘, 이왕 정리 정돈을 시작했고, 좀 진득하게 미국에 있을 거면 예전 책들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소설과 수필집을 분리해 꼽는다. 언제 샀더라, 언제 읽었더라, 책장을 넘겨 보기도 하고. 옛기억을 더듬는다. 책장의 첫 페이지에는 언제, 어디서 샀는지 적혀 있기도 하다. 어느날 내 기억이 희미해 지는 시간이 오더라도 그 책장을 들추어 보며, 아~ 그땐 그랬구나, 할 수 있게. 선물로 받은 책. 저자 싸인이 있는 책. 문학 강연과 피정에서 만났던 인연. 그 분들은 나를 기억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기억한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었고 그땐 무얼 열망했었는지.
소설과 수필은 거의 반반 씩이다. 한때 소설을 써 볼까 생각을 하며, 샀던 레퍼런스 비슷한 책들. 동향의 작가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정희 소설가의 소설집. 오정희의 단편 <동경>을 읽으며, 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책장 정리를 하다말고 책을 다시 들추어 본다. 글에 가득 담겨 있던 노년의 쓸쓸함과 죽음의 그림자를 동경(구리거울)을 통해 비추어 내려 했던 작가. 나의 오늘과 오버랩되며 지나간다.
이어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펼쳤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는 한마디를 건졌고, 페이지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의 소설의 바탕이 되었던 여행. “이 책을 쓰는데 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 했다”는 작가. 살면서 만나는 독서는 발품이 들지 않는 여행, 일 수 있다.
책장 정리를 하다말고 마루에 털썩 주저 앉았다. 책을 넘기며 추억도 내 곁에 함께 앉았다. 다시 읽기 시작한 고전들도 한쪽에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종이 책을 늘리지 않기 위해 요즈음은 이북을 선호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책장을 넘기며 추억을 들추어 내는 행복. 이 소소한 기쁨이 오늘을 살아야 하는이유 인지도 모른다. 책장 정리를 하며 다시 찾은 추억들. 들추어보며 켜켜히 쌓인 기억은 더욱 단단해진다. 커피는 이미 식었지만 마음엔 온기가 가득하다.
<
전지은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