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불륜도 막장도 아닌, 그리고 머리를 써가며 시대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잔잔하고 느긋한 드라마를 보았다. 바로 박인환 씨가 주인공인 ‘나빌레라’라는 작품이다.
특히 박인환이 매일 가지고 다니는 까만 수첩에 쓰여있는 한마디가 시청자를 깊이 울렸다. “나는 알츠하이머 입니다”알츠하이머라는 병명이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그저 치매 노인이 되면 정신줄을 놓고 미친 사람이 되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가끔 동네를 돌아다니는 미치광이를 본 적은 있지만, 집안의 수치로 여겨 밖으로 노출되는 걸 극도로 싫어해 그런 노인네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숨기는 집이 허다했다. 우리 엄마 또한 알츠하이머로 오랫동안 살아만 계시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나의 미래와 오버랩 되었다. 내가 70이 되었다.
약 20년 후의 내 자식들은 모두 자기의 일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전형적인 평범한 미국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천천히 하루의 일과를 이행한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었고 일어나자마자 여전히 모닝커피로 눈을 뜬다. 햇볕 드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신문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70번째 맞이하는 새봄인데 만날 때마다 이리 부끄러우니 이제 몇 번 남지도 않을 봄이련만 언제 익숙한 모습으로 인사할지 모르겠다. 나는 내 엄마가 치매가 시작된 나이가 되었다. 하나둘 기억해야할 것들이 줄어들 나이가 되었지만, 꼭 필요한 기억은 늘어만 나는듯하다. 서서히 기억이 지워질 거라는 충고를 의사에게 들어서 너무 슬픈 날이었던 기억도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나누었던, 치매에 걸리면 안락사하고 싶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아들에게 전화로 확인해놓은 참이다.엄마가 조금씩 기억이 지워져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엄마를 부디 저세상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아들은 울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세포의 70%가 없어지는 그 지점에 안락사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끔 내 주치의에게 조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우리는 흔히 아무리 몹쓸 병에 걸린다 해도 치매는 피하고 싶다고 한다.
정신이 밖으로 나가있는 상태에서 숨을 쉬며 인생을 연명한다면 숨 쉬지 않고 그냥 이 세상과 이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머리는 온전하지만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당연히 지각 있는 행동으로 사고할 수 있어서 감히 생과 사를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치매처럼 정신세계가 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나는 70이 된 우리 엄마의 얼굴이다. 아침 햇살의 따뜻한 온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설레는 하루를 만나며 글을 쓴다. 치매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하루해가 넘어가고 있는 저 능선의 해 길이만큼은 아니리라. 저 붉고 건강한 해가 보이지 않은 저세상으로 넘어가는 그런 날, 나의 기억도 해와 함께 넘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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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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