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2월7일 지브롤터.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779년 6월 공격이 시작된 이래 3년 7개월 보름 만이다. 영국군 수비대는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가진 적을 물리치며 지브롤터를 지켜냈다. 영국의 소수가 다수를 누른 작전과 병참의 승리는 방어전의 모범으로 꼽힌다. 비록 미국 독립전쟁에서 밀렸지만 영국은 여전히 최강이라는 인식을 유럽 각국에 각인시켰다. 병력이 최대치에 달할 때도 1만명을 넘지 않았던 영국군 수비대의 분전이 국격을 높이고 유산까지 만든 셈이다.
스페인은 1704년 영국에 빼앗겼던 지브롤터를 미국 독립전쟁을 틈타 되찾으려다 오히려 영국땅으로 굳혀줬다. 공방전 개시 시점의 영국군은 5,382명. 스페인군은 1만3,749명으로 2.5배 이상 많았다. 전투 종반 무렵 병력 차이는 더 벌어졌다. 영국군 7,500명 대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 6만5,000명이 싸웠다. 최종 인명 피해는 영국군 333명 전사와 1,008명 부상에 스페인 프랑스 연합군은 사상자 6,000여명을 냈다. 영국의 승리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첫째는 영국 수비대의 분전. 무엇보다 62세의 백전노장 조지 엘리엇 장군의 지도력을 빛을 봤다. 공병 출신인 그는 바위산을 깎아 터널을 만들고 해안을 향해 저각 발사할 수 있는 대포를 설치해 승리를 이끌었다.
둘째는 병참 능력. 공격자들은 영국군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으나 영국 해군은 세 차례나 봉쇄선을 뚫고 물자와 병력을 실어날랐다. 영국 수비대와 구조함대가 보유한 소총과 대포의 수가 적었어도 침공군보다 많은 총탄과 대포알을 쏘았다. 경제력과 병참이 승리한 셈이다.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쓴 앨프리드 머핸은 지브롤터를 상실한 후 스페인의 해양력이 급속도로 위축됐다고 봤다. 크기라야 여의도의 80%에 불과한 바위산 지브롤터를 영국은 알토란처럼 써먹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석권하기 직전에 지브롤터를 근거지로 삼은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스페인 저항군에 골머리를 앓았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지브롤터를 활용해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변의 육지라고는 스페인 땅뿐인 바위산이지만 지브롤터는 여전히 전략적 요충이다. 앞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이 펼치고 왼쪽으로는 지중해, 오른쪽은 대서양인 지브롤터.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렸던 이곳을 8세기 이후 지배한 세력은 이슬람(711년), 스페인(212년), 영국(316년)으로 변했다. 영국은 이 땅을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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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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