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월23일 만 34세의 사내가 19년 선원 생활을 접고 런던항에 내렸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망명객이자 방랑자, 18세가 돼서야 영어를 접한 30대 중반의 이방인의 이름은 조지프 콘래드.
병든 몸으로 귀항한 그가 ‘로드 짐’ ‘어둠의 심연’ ‘문명의 전초기지’ 등의 명작으로 세계적 필명을 얻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초년부터 그는 풍랑 속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귀족이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모친이 병사하고 부친도 독립운동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 12세에 고아가 돼버렸다.
고향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대항한 폴란드 반역자’의 아들이어서 25년간 병사로 근무해야 하는 징벌을 피하려 프랑스에 도망와 15세에 배에 올랐다. 4년 뒤 영국 내로 옮겨타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전형적인 호즈파이프(hawsepipe)의 길을 걸었다. 밑바닥 선원에서 사관 지위로 승진하는 게 마치 닻줄이 닻줄구멍(호즈파이프)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2급·1급 항해사 시험에 이어 29세에는 선장 시험에도 합격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영국에 귀화하고 직급이 올라도 생활 형편은 언제나 쪼들렸다.
귀족 출신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씀씀이가 컸던 탓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기댈 구석이 있었다. 외삼촌의 끊임없는 후원으로 투기 실패와 결투로 인한 지출도 견뎠다. 선장으로서 한창나이인 30대 중반의 콘래드가 뭍에 정착한 이유는 세 가지. 건강이 나빠진 마당에 범선 선장의 수요까지 격감한데다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가 생겼다. 마침 폴란드의 외삼촌이 사망하며 유산도 남겨 상대적인 경제적 여유 속에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곧 주목받았다. 아시아 항해를 경험으로 내놓은 ‘말레이 연작’은 영국의 생활 방식을 모르는 그로서도 영국 독자의 공감을 불러낼 수 있었다.
논란도 많다. 대표작인 ‘어둠의 심연’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도 유명하지만 ‘한 작품 안에 반제국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인종주의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영국 국적의 자유주의자로서 벨기에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서양인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서구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파헤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본업인 영문학자로서 콘래드를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다. 작가로서 명성이 높아지며 말년의 콘래드는 풍족하게 살았으나 더 큰돈을 번 사람도 있다. 콘래드의 원고를 사들이며 후원을 자처했던 미국인 사업가는 약속을 어기고 원고를 경매장에 내놓아 10배 이상의 차익을 얻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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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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