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0월29일 앙카라. 초대 대통령을 맡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당시 42세)가 터키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때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오스만제국도 1299년 이래 624년 만에 숨을 거뒀다. 터키인들은 제국의 몰락을 슬퍼하기는커녕 공화국 출범을 반겼다. 터키 공화국은 상실했던 영토의 수복이며 잃었던 주권의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늙고 병든 오스만제국에서 젊고 의욕 넘치는 터키 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터키인들은 자랑스럽게 여긴다. 공화국 출범 100주년을 앞두고 최초의 국산 전투기 초도비행 등 각종 기획이 한창이다.
터키 공화국은 위기와 분노 속에서 태어났다. 무엇보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는 바람에 국토가 크게 쪼그라들 상황을 맞았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이 영국,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고 에게해의 섬들은 숙적 그리스로 넘어갔다. 승자인 연합국은 소아시아 지방까지 그리스에 할양하고 동쪽 땅을 떼어 아르메니아에 줬다. 명줄만 남아 있던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이런 내용이 담긴 세브르 조약을 덥석 받아들였다. 오스만의 강역이 오늘날 터키 영토의 30% 선으로 줄어드는 세브르 조약은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렀다.
저항운동의 핵심은 무스타파 케말 장군. 영관 시절부터 탁월한 전과를 올린 인물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해군 장관이 주도한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세계 최강 영국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준 적도 있다. 세브르 조약을 거부하는 의회를 주도했던 그는 술탄에 충성하는 소수 오스만군은 물론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한 그리스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직접 참전한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 군대에도 당당히 맞섰다. 터키 국민들은 앞다퉈 입대하며 독립과 영토회복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는 1922년 7월 말 로잔회의를 통해 터키의 고유 영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 승리의 힘으로 세워진 터키 공화국은 열강을 따라잡겠다는 열의로 서구화를 비롯한 각종 개혁을 펼쳐나갔다. 사망(1937년)하기 3년 전 터키 의회가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헌정할 만큼 케말 파샤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이슬람으로의 회귀 움직임 속에서도 국제공항을 비롯해 도로며 기념관에 이름이 남아 있는 아타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터키의 자부심이며 기둥이다. 상대적으로 고성장을 구가해온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강국으로 발돋움한다는 꿈을 밀고 나가고 있다. 아타튀르크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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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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