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감독원의 전신 중 한 곳인 증권감독원의 사무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2월 말만 되면 텅텅 비었다. 국장급 간부와 잡무를 담당하는 여직원만 간간이 눈에 띌 뿐 그 많은 책상을 차지하고 있던 직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사무실이 아닌 상장사들의 주주총회장. 당시만 해도 증권감독원은 무분별한 무상증자 약속과 총회꾼 방지를 위해 직원들을 주총장에 참관자로 파견했는데 이때만 되면 수많은 상장사가 한꺼번에 주총을 열면서 인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직원 한 명이 하루에 3곳 이상을 뛰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을 보면 주총 집중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된다.
한국에서 ‘무더기 주총일’ 또는 ‘슈퍼 주총 데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당시 회의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돈을 뜯어내는 ‘총회꾼’이 활개를 치자 주요 그룹 계열사들이 한날한시에 주총을 열어 이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했던 것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장사의 의도대로 총회를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부각하면서 집중화를 부추겼다. 상장사 하루 최대 주총건수가 1974년 20개에서 1991년에 229개로 불어나고 금융감독당국이 주총일 분산을 지적하기 직전인 2017년에는 무려 924개에 달하기도 했다.
주총일이 집중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대규모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은행회관이나 호텔이 전부였던 1970년대 상장사 직원들이 주총 장소를 잡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예약전쟁을 벌여야 했고 회의장 확보에 실패한 일부 상장사는 결국 예식장을 임대하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주요 그룹 계열사들이 같은 날 한 군데에서 동시에 주총을 개최하다 보니 회의가 열리고 1시간 남짓 지날 때마다 다른 계열사 직원이 뛰어와 회의장 앞의 회사명만 바꾸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슈퍼 주총 데이가 올해도 어김없이 되풀이될 모양이다. 한국상장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 분석에 따르면 정기주총 소집일을 확정한 884개 12월 상장결산법인 중 4분의1인 223곳이 다음달 27일 주총을 개최하기로 했고 26일로 결정한 곳도 180곳이나 됐다.
상장사 절반의 주총이 단 이틀에 몰려 있는 것이다. 예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소액주주의 주주권 강화와 주총 내실화 요구는 이번에도 회의장 뒤편으로 밀려났다. 아무래도 홍길동의 분신술을 배워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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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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