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유명한 토익학원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였다. 300명이 넘게 앉아 있는 강의실은 1월인데도 후덥지근했다.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나눠줄 학습지는 A4 박스로 두 박스, 빔 프로젝터는 강의실 맨 앞에 둘, 강의실 중간에 둘이 더 있었다.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소규모로 모여서 스터디를 했다. 매일 단어시험을 봐서 틀린 만큼 벌금을 걷었고, 무단결석이나 지각일 경우는 벌금 액수가 더 높았다.
취업 및 졸업요건을 위해 토익을 공부하던 학생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난 왜 영어를 못해서 이렇게 힘들게 배워야 되는 걸까, 이번 생에 영어 정복하기는 틀렸어, 영어는 머리가 몰랑몰랑한 어릴 때 배워야 하는데 나는 이미 늦어서 안 될 것 같아, 등등.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영어는 과연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일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라면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걸까?
언어 능력은 단일하지 않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쓰면서도 어떤 사람은 대학 소논문 과제만 나오면 A+을 받지만, 달달한 연애편지를 써야 할 때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어떤 사람은 저녁드라마 대본은 시청률 대박을 칠 만큼 잘 쓴다 해도, 사업 제안서를 쓰라고 하면 날밤을 새며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른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프리젠테이션을 잘 하기 위해서는 관련 자료를 독해하는 능력, 필요한 자료를 영문으로 옮기는 능력, 발표에 쓰이는 영어표현을 말하는 능력, 영어로 효과적인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작성하는 능력, 영어 질문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 분위기에 맞추어 영어로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며 청중을 이끄는 능력 등이 총체적으로 필요하다. 단순히 ‘영어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능력을 키우고 싶은지’ 고민해야 한다.
보통 일상 대화가 상대적으로 쉽고 학술 발표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언어 능력은 수직적이니까 기초 능력인 일상 대화부터 쌓아가면 학술 대화도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학술 프리젠테이션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일상 대화는 젬병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영어 논문을 쌓아 놓고 읽는 학자들이라도 파티에 가서는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와인 잔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도 한다. 친구와 대화하기, 전화로 카센터 아저씨와 예약 잡기, 영어메일 써서 필요한 견적 내기, 연구 주제에 대해 발표하기 등등 영어로 할 일들은 수없이 많다.
이 일들은 난이도별로 수직적으로 정렬되어 있다기보다는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그 중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을 지칭하는 ‘원어민’이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마치 마법처럼 쓰인다. “이 책 한 권이면 원어민처럼!” “원어민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500개!” “원어민 버터발음!” 같은 말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원어민은 영어학습자가 목표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원어민과 비교하며 스트레스 받을 이유도 없다.
언어 능력은 단일하지 않다. 영어를 공부할 때 우리는 단일한 영어 ‘능력’을 수직적으로 올리는 게 아니라, 영어로 할 수 있는 수평적 ‘레퍼토리’ 를 늘려가게 된다. 영어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나 넘어야 할 벽이 아니다. 학습자가 해야 할 것은 영어를 배우는 목적을 확실히 세운 후, 현실적이고 세부적인 목표를 세워 그에 맞는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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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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