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신록은 뜨거운 햇살을 품고 시리도록 푸르름이 당당한 데, 눈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더위와 씨름하는 오후는 점점 퇴행되어 가는 시력 위에 희미한 스크린까지 늘어지고, 깜빡 거리며 눈 시계는 무거운 추를 달고 엉금엉금 하루를 넘어 간다.
학교마다 방학을 하고 휴가를 떠나는 계절이다 보니 가게에도 아침나절 부지런히 일을 마치고 나면 한가로운 오후를 접견한다. 시간이 생겨도 구체적인 계획을 할 수 없는 일터에서 신문을 보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을 열어 이곳저곳 검색창을 기웃거린다. 계절이 계절 인지라 화려한 꽃들과 미끈하게 잘 생긴 과일들이 톡톡 튀어 나오고 텃밭에 채소들이 소담스럽게 자라는 정겨운 풍경도 손바닥 안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다양한 포스팅 중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은 역시 먹는 음식이다. 오늘 저녁 메뉴를 찾아 습기 찬 손가락에 촉을 세운다. 이열치열 뜨거운 음식으로 땀 사우나를 해 볼까, 육수에 얼음 동동 띄워 냉면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할까, 원초적인 욕구를 탐색하는 신중한 고민을 한방에 날려 버리는 청량한 한 미디- 그렇게 고민할게 뭐 있나 메밀국수 삶으면 제일 간단하잖아.
밀가루 음식을 즐기던 남편이 그나마 몸을 생각한다고 한 발 양보하고 선택한 메밀국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름식탁의 주인공이 된지 벌써 몇 해가 되었다. 그런 남편을 위해 냉장고 안에는 양념장과 무우다대기를 항상 대기 시켜 놓고, 기분에 따라 부 재료만 바꿔서 면발을 치장한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날엔 잘 익은 배추김치를 송송 썰어서 참기름을 듬뿍 치고 조물조물 무쳐서 투명한 사발에 수북하게 올려놓으면, 창틀을 두드리는 빗방울 전주에 맞춰 젓가락 행진곡이 빠르게 리듬을 탄다. 오이와 깻잎 상추 등 온갖 신선한 야채를 모듬어 준비하고,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빨간 고추장도 넉넉히 투척하면, 새콤매콤 달달하게 진한 향기 품고 장미보다 빛 고운 매혹의 맛을 뿜어낸다. 소스에 따라 색다른 맛과 비주얼의 변신을 주저 하지 않는 매력에 무더위도 술술 넘어 간다.
사계절 중에 낯의 길이가 길어서 활동하는 시간도 많아지고 그래서 먹고 싶은 음식도 다양 하다. 식욕이 떨어지고 삶의 리듬감도 사라지는 끈적한 여름철에는 보양식이라는 특별한 음식도 인기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강한 체력을 위해서는 제철에 나오는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명약이라고 생각한다. 스마트폰 검색을 하다 보니 보리수 열매가 싱싱한 가지에 앙증맞게 달려있다. 때어서 손에 들고 흔들면 종소리가 투명하게 울릴 것 만 같다 . 입안에 침이 고이고 새콤한 맛이 가슴으로 전이되어 노래로 흘러나온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네~. 슈베르트의 달콤한 선율을 더듬으며 여름밤은 깊어져 가는데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메밀국수 냄새가 심사를 혼란스럽게 한다.
퇴근하기 바로 전에 간단히 저녁 요기를 하고 운동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저녁을 먹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두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는데, 그 원인이 다 메밀국수 때문이었다. 늦은 밤엔 음식을 멀리하자고 둘이서 약속도 했는데, 식욕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연약한 의지가 야속하기만 하다.
운동 후에 허기를 메밀국수로 달래는 남편이 호호 거품을 불어 가며 국수를 삶는다. 부엌에서 서성이는 어설픔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거들어 주다 보면, 대본에도 없는 먹방 연기가 식탁이 아닌 거실에서 리얼하게 상영된다. 관객은 아홉 시 뉴스를 진행하는 미녀 아나운서. 한 여름 밤의 유혹이 언제쯤 한여름 밤의 꿈이 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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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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