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리 번바움이 말하는 “삶에 직선행로만 있는 건 아니다”
냄새를 따라 뉴욕을 누비는 몰리 번바움이 강한 향신료 냄새가 배어 있는 인도 음식 전문점‘주눈’의 식자재 보관실에서‘향기의 향연’을 즐기고 있다.
진부한 말이지만, 공기처럼 늘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제 가치를 오롯이 인정받지 못한다.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리사 지망생이었던 몰리 번바움(29)은 자동차 사고로 후각을 잃기 전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하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요리사에게 후각기능은‘존재의 이유’를 떠받치는 버팀목이다. 지난 2005년 8월, 번바움은 매서추세츠주 브룩클린에서 조깅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골반이 부러지고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컸다. 두부 외상의 충격으로 그녀의 세계에서‘냄새’가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냄새가 실종되면서 음식의 맛과 향기도 그녀를 떠나갔다.
명문 브라운대 졸업 후
식당 설거지 하며 요리사 꿈
어느날 교통사고 후각 잃어
기적처럼‘냄새’ 되찾았지만
뇌의 인지기능에 다소 문제
요리책 쓰며 인생 깨우쳐가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 이탈리아의 ICIF와 함께 세계 3대 요리전문 학교로 꼽히는 미국의 CIA 요리학교 입학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터진 횡액이었다. 의사들은 그녀가 잃어버린 후각 기능을 평생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요리는 그녀의 사랑이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는 요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그대로 남겨둔 채 사랑을 이루는데 필요불가결한 기능만을 빼앗아갔다. 냄새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녀의 사랑은 무기력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 번바움은 캠브리지에 위치한 ‘크레이지 스트리트 비스트랏’이라는 식당의 주방에서 일했다. 그곳의 숙수인 토니 모우는 브라운대학 졸업생인 번바움이 일자리를 구하는 편지와 이력서를 보내왔을 때 “평생 양고기를 구워본 적도, 냄비를 닦아 본 적도 없는 젊은 여성의 요리에 대한 몽롱하고 로맨틱한 환상”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력서와 함께 보낸 편지는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모우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마도 편지에서 묻어나는 진정성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마침 모우는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담당할 주방 보조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요리를 배우고 싶다 해도 아이비리그 졸업생이 주방 보조직을 수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우는 번바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이 지저분해지고 허리깨나 아플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함께 일하자”는 그의 제안을 번바움은 감지덕지 받아들였다.
그녀는 모우에게 약속한 대로 허리가 휘는 듯한 고통을 잘 참아냈다. 요리에 대한 번바움의 호기심과 욕심은 강력했다. 일감을 쌓아둔 채 숙수의 손놀림을 훔쳐보다 모우로부터 “네 일이나 하라”는 지청구를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번바움이 선택한 세계로 통하는 길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녀의 눈앞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사고가 나기 전 나는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직선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행로로 일찌감치 정해 버린 그 일직선의 외길은 결코 변치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고를 당한 후에 그녀는 개인의 판단과 통제범위를 수시로 이탈하는 현실 세계의 가변성을 아프게 깨달았다.
후각을 잃은 뒤에도 번바움은 요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감각’에 의존해 맛을 ‘창조’할 수는 없었지만 기계적인 정확성과 디테일로 맛을 근사치로 ‘복사’할 수는 있었다. 예를 들어 정확한 식자재 배합과 조리 타이밍으로 할머니의 특기인 딸기 루바브 파이를 제법 비슷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맛인지 알 수 없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무의미한 작업이었다. 후각과 미각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를 막고 초컬릿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으면 초컬릿 맛을 느끼지 못한다. 초컬릿 맛이건 딸기 맛이건 아니면 민트 맛이건 아이스크림은 그저 똑같이 차고 달콤할 뿐이다.
번바움의 말을 빌리자면 “후각 장애자의 입 안으로 들어간 모든 음식은 온도와 질감만으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후각 장애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은 만성 축농증과 두부 외상이다.
펜실베니아대 후각·미각센터의 디렉터인 리처드 도티는 반버움처럼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되면 뇌가 요동을 치게 되고, 이때의 강력한 출렁거림으로 신경 필라멘트가 끊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끊어진 신경가닥은 재생되지만 반흔 조직, 다시 말해 상처 난 조직으로 인해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반버움의 경우에는 뇌 조직과 신경의 손상이 워낙 심해 후각기능이 되살아나기는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의사들의 소견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사고가 난 후 수개월 뒤 로즈메리를 잘게 다지던 중 갑자기 코 안에 번쩍 섬광이 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향신료인 로즈메리의 강력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후각기능이 돌아온 것이다.
의료진은 “번바움이 어떻게 후각을 되찾았는지 미스터리”라며 고개를 갸웃댔다.
‘코’가 돌아온 후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유니언 스퀘어 그린마켓으로 나들이를 간다. 냄새를 쫒아가는 여행이다.
그린마켓을 구석구석 쏘다니며 그녀의 세계에 다시 맛과 향을 입힌다. 반바움의 발길은 그린마켓에서 멈추지 않는다. 증발한 뉴욕의 냄새를 온 몸 가득 채워 넣기 위해 큰 길과 골목을 가리지 않고 누비고 다닌다. 잃었던 후각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뒷골목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악취까지 반갑고 정겹다.
느닷없이 가출했던 후각기능은 또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왔지만 가끔씩 코로 들어온 냄새를 머리에서 분석해 내지 못한다.
그녀는 “모든 냄새를 다 맡을 수 있지만 감각기능이 아니라 인지기능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 요리사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낙담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직선 행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삶이란 시냇물처럼 장애물을 타넘고 휘돌며 제 갈 길을 찾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친 탓이다.
그녀는 요리를 포기한 대신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요리책의 에디터로 근무하며 음식에 관한 글을 쓴다. 음식이 역사와 문화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추적하는 것은 레서피를 길라잡이 삼아 맛을 따라가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
후각 상실은 그녀의 사고를 숙성시키는 효소의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지니고 있던 것을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그 안에 담긴 가치를 깨닫는다.”
그린마켓에서 로즈메리의 향기를 맡던 그녀가 문득 선문답처럼 던진 말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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