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것 중에 ‘종속이론’이란 것이 있다.
세계 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국과 거기 종속된 변두리 국가로 이뤄져 있으며 모든 것은 패권국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기 때문에 주변 국가는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이 이론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미국에 종속된 한국인들은 날로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데 실상은 나날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골수 좌파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미국과 어느 나라보다 등을 지고 사는 북한이야말로 망해 가는 것이 뻔해지면서 이 이론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된 세계 금융위기가 오히려 한국 등 주변 국가를 더욱 강타하면서 이 이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지난해 10월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지금까지 40%가 떨어졌지만 한국 코스피 지수는 60% 가까이 깨졌다. 금융위기의 본산인 미국 달러화는 거꾸로 급등세를 보이고 원화는 1년 사이 50% 이상 폭락했다. 한국 주가는 달러로 환산하면 1년 사이 80%가 폭락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소위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브릭스’(BRIC’s)라 불리는 신흥 강국들도 대체로 사정이 비슷하다. 중국과 러시아 주가는 70% 추락했고 브라질과 인도 증시도 폭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레알과 루블 등 화폐 가치가 떨어진 것을 고려하면 이들 나라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입은 손실은 어마어마하다.
신흥국뿐이 아니다. 한 때 월 스트릿 발 금융 위기를 즐기며 손가락 질 하던 유럽 각국도 은행 부도와 증시 폭락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런던의 풋치 지수나 독일의 닥스 지수 모두 1년 사이 반 토막이 났고 유로화도 몇 달 사이 달러 대비 25%가 떨어졌다.
세계 여러 나라 중 달러에 대해 유일하게 강세를 보이는 것은 일본 엔화다. 일본은 1조달러에 달하는 외환 보유고도 보유고지만 개인들이 쌓아두고 있는 자산이 18조달러에 이른다. 거기다 지난 10여년 간 장기 불황을 겪은 덕에 거품이란 거품은 다 빠졌고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맷집이 생겼다. 그럼에도 니케이 지수는 1년 사이 절반이 빠졌다.
세계 주가가 이처럼 동시에 폭락하고 있는 것은 이번 불황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과거 일본이나 동남아, 러시아가 경제 위기를 맞았을 때는 미국이나 중국이 버텨 줘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럴만한 세력이 없다. 유일하게 중국이 아직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계가 동반 침체에 빠져드는데 중국만이 언제까지 호황을 누릴 수는 없다.
이번 금융위기는 역설적이지만 아직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막상 일이 터지자 모든 사람들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이 미국 달러와 연방 정부 채권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때 1년 미만 단기 연방 채권 수익률은 0% 근처로 내려갔었다. 본전만 찾을 수 있다면 이자는 필요 없다는 투자가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준 것이다.
베어스턴스 몰락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가 터졌을 때만 해도 미국은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가지 않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만 되도 다행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금융위기가 해결되려면 우선 그 근본 원인인 주택가가 안정돼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이를 바탕으로 한 채권시장이 정상화 돼야 하며 이에 발맞춰 신용 경색이 풀리고 증시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모두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들이 아니다.
올해는 길고 추운 겨울이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겨울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봄이 올 때까지 참고 견디는 인내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