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32가의 뒷골목에는 어두움이 빨리 왔다. 뼈를 깎아 내리는 바람은 작은 골목길도 봐주지 않고 쑤시고 들어왔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목이 긴 빌딩에서 재빨리 빠져 나와 지하철로 혹은 버스 속으로 숨듯 사라져버린다. 높은 빌딩들은 을씨년스러운 어두움 속에서 추운 밤을 버틴다.
혁은 오늘도 하루 종일 시내를 걸었다. 그리고 이 뒷골목으로 간신히 돌아온 것이다. 벌써 검은 그림자 사이로 시커먼 드럼통에서 따뜻한 불꽃이 하늘로 솟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몸으로 따뜻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아 혁의 몸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혁은 옆사람들을 밀치고 불에 가까이 갔다. 이 것이다.
혁이 학교를 뛰쳐나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이제껏 혁은 자기 성취를 위해 한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고 살아 왔던 것이다. 그는 유치원부터 고교 졸업까지 학교와 학습에 열중했다. 그것이 최선의 일이었고, 부모님이나 형제, 동료들이 그의 학업에서 거둔 성공에 열광했다. 혁은 보스턴에 와서도 도서관과 기숙사 외에는 잠자는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혁이 매일 앉는 책상 옆으로 천장까지 높은 창은 혁이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혁이 근 일년동안 도서관 창으로 바라보던 하늘, 나무, 그리고 오후가 되면 으레 독서를 하는 노인과 벤치들은 책과 씨름하는 그에게 정다운 벗이었다. 어느 날 혁은 텅 빈 벤치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없었다. 하지만 까만 책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일주일을 넘어서도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책은 벤치 위에 그대로 남겨진 채…. 혁은 호기심에서 정원으로 갔다. 책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된 책이었다. 뒷장에는 조셉, 23번지 케임브리지 라고 또박또박 쓰여있었다. 혁은 책을 가지고 주소를 찾아갔다. 양로원이었다. 할아버지는 깔끔히 정돈된 방에 그가 설계한 건축물 모형도를 벽에 빽빽이 붙여놓고 있었다. 혁이 책을 건네자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감사하다고 혁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혁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아버지를 찾았다. 그는 중풍으로 온몸을 가누지 못했다. 혁은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창밖에 흐르는 강을 바라봤다. 그가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혁은 할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할아버지는 그의 머리맡에 낡고 두툼한 노트를 혁에게 가져가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그가 석좌교수로 있던 대학에서 정중한 장례를 치렀다. 추모사에서 그는 유년시절을 폴랜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와서 저명한 건축설계자가 되기까지의 역경을 소개하고 있었다. 식이 끝난 후 그의 법정대리인이 그에게 한 장의 유서를 건네주었다. “나에게 진정 사랑을 처음이며 마지막까지 베풀어준 자네에게 감사하네. 나는 일생 사람이 무서워서 건물을 짓고 세웠네. 그런데 자네가 정말 나에게 건물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네. 고맙네, 자네에게 모든 건축 설계소유권을 남기네. 물론 재정적인 권리는 이미 사회재단에 기부되었네. 자네는 나와 달리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건물을 지어보게. 내 일기도 나의 유산으로 간직해 주게나…”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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