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라크에서 한국인 인질 김선일씨가 죽기 전 눈이 가려진 채 총구 아래에 무릎 꿇고 있던 모습은 우리에게 소름끼치도록 익숙한 것이다. 한 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전쟁과 독재의 피해자로, 가해자로 살았던 지긋지긋한 기억들을 줄줄이 가지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 한국전쟁, 그리고 거의 40년에 걸친 독재와 군사통치를 거치며 우리는 폭정과 고문을 견뎌왔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 이라크에서 그런 끔찍한 경험을 다시 겪어야 하는가.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과 우리의 복잡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이라크에 대한 한국의 역할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의 역할과 똑같다.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간 관계강화를 위해 31만2,853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4,600명의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고 수천명이 부상했다.
이후 우리는 피나는 노력으로 경제를 일구고 서서히 민주화의 기틀을 잡아갔다. 그러나 고층건물과 SUV 그리고 프라다를 떨쳐입은 10대와 셀폰의 성공 아래서 우리는 해묵은 상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선일씨가 참수되었을 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말을 노무현 대통령도 했다. 좌파성 포퓰리즘으로 워싱턴이 우려했던 노 대통령은 지금 이미 이라크에 가있는 660명 외에 3,000명을 더 보내려고 작심을 하고 있다. 탱크와 중무기를 갖춘 전투병력이 추가 파병될 경우 김선일씨의 죽음은 이제 악몽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한국군 사상자가 늘고, 그러면 추가 파병을 하고, 그러면 사망자는 더 늘고.
우리 정부가 계속 하는 말은 국익이다. 하지만 뭐가 국익이란 말인가. 1963년에 그랬듯이 한국 정부의 진짜 목표는 미국에게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냉전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지 않다. 더 이상 마음 속 말을 하면 잡혀 들어가는 나라에 살고 있지도 않다.
무장집단이 김선일씨의 목숨 대신 요구한 것은 이라크 파병 취소였다. 한국은 그렇게 했어야 했다. 테러리스트가 그런 요구를 해서가 아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국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하연/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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