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튀기’라고 손가락질 받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미국에 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저는 아직도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닌 영원한 국제 고아 신세입니다.”
6일 혼혈인 인권회복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오흥주 미국내 한국계 혼혈인협회 회장(50.사진)은 한미 양국 어디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혼혈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눈물로 전했다.
한국전 직후인 1954년 백인계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회장의 일생은 아버지에 버림받고 사회로부터도 외면당한 혼혈인의 존재, 그 자체였다.
동네 친구들은 걸핏하면 ‘튀기’라고 놀려댔고 호적이 없어 초등학교 입학도 어려웠다. 양아버지는 자식 취급도 않고 구박을 일삼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은 없었다.
그마저 유일한 보호막이었던 어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집에서는 학비도 주지 않았고 양아버지는 저만 보면 집을 나가라 성화였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이때처럼 많이 울어본 기억은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쳤으나 먹고 잘 데가 없었다. 군대에 자원했지만 혼혈아는 입대할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생계를 위해 직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한국은 제게 희망이 없는 고통의 나라였습니다. 미국에 가고싶었지만 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이민법이 바뀌면서 1985년 12월 태어나고 30년 이상 자란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한국을 향해서는 두 번 다시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막상 미국에 왔으나 영어를 할 줄 몰라 미국 사회에 낄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한인동포들에로 돌아왔다. 청소도 하고 세탁소 일도 하면서 정착의 의지를 불태웠다.
몇 년전에는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포들은 50줄을 바라보는 그에게 여전히“혼혈아” 운운하며 상처를 주었다.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쟤는 어디 사람이냐”며 쑥덕거려댔다.
그의 눈물과 상처는 미국에 와서도 아물지 않았다. 3년전 같은 처지의 혼혈인들과 모임도 만들었다. 5명이 시작, 한달에 한번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왔다. 지금은 10가정으로 커졌다.
그가 추산하는 한국내 혼혈인 수는 15만명. 미국내에는 3천명, 워싱턴 지역에는 2백명 가량의 혼혈인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혼혈인들도 한국인입니다. 저는 아직도 한국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아직도 식탁에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합니다. 제 아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같은 한국인입니다.”
그가 비참한 과거를 들춰내는 상처를 감내하고 혼혈인 인권 회복운동에 뛰어든 것은 바로 2세들에 그들이 겪은 아픔을 나눠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