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혹사시킨 몸을 오후에 헬스클럽 뜨거운 물에 넣으면 피로의 때가 벗겨진다. 덕분에 나는 하루 한번은 남자에 한하지만 벗은 모습들을 본다.
중요부분을 살짝 가린 젊은 여인들이야 클럽 수영장에서 보게 된다. 잘 균형 잡힌 몸으로 헤엄치는 모습에서는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그대로 표출된다. 그러나 세월을 훨씬 더 헤엄쳐 온 할머니들은 넘치는 살갗을 추슬러 주는 수영복 차림으로 그 살을 빼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을 보면 왠지 쓸쓸해져 한숨을 쉰다.
남자 전용구역 탈의실에서 나도 알몸이 되어 자쿠지 탕으로 들어가 고개만 내놓으면 알몸의 행진을 보게 된다. 나온 배로 나이가 가늠된다. 노년에 들어서 어깨 근육이 옆구리까지 흘러내린 이. 이탈리아 도시 중심부에 선 동상처럼 빨래판 배를 가진 젊은 남자. 그 몸도 얼마 지나면 물에 씻기듯 흘러내리겠지. 알몸은 세월 따라 모든 구조가 하향하는구나. 문신한 등판, 근육질, 모두 일렬종대로 서서 세월을 씻어낸다.
인간의 수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 발가벗김이다. 아무리 어깨에 힘을 넣고 다니던 이도 홀딱 벗겨 보라, 죽음에 버금가는 치욕. 군사정권에서 이용해 먹던 저주받을 고문 방법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벗은 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이들의 살결에는 싱싱한 희망의 냄새가 난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공주에서 자랐다. 우긍고개를 넘으면 계곡 따라 흐르던 물이 제민천이 되어 읍내 중심부를 지나 금강으로 흐른다. 물고기가 반짝 물 위로 솟구치기도 하는 물이 사범학교 앞 자갈길에 이르면 제법 큰 맑은 웅덩이가 되어 우리들을 유혹한다. 팬티도 벗어 던지고 뛰어들어 물장구를 친다. 길 위에서는 무언가 비밀이 생기기 시작한 중고등학생들이 부러운 듯 웃는다. 벗어도 부끄러움이 없던 시절. 거기다가 맑은 물이 집 앞을 흐르던 무공해 시대. 눈물이 고이도록 소중한 추억이다.
오늘도 백인이건 흑인이건 물을 틀어 몸을 씻어 낸다. 언제쯤 우리들 덕지덕지 붙은 체면을 벗어 던지고 속마음을 꺼내어 신나게 닦아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까.
정권을 잡는 이들은 감추려 들고, 무조건 껴입으려 든다. 권력을 내놓는다는 게 알몸이 된다는 것, 치부가 공개된다는 걸 정말 모른단 말인가.
김대중 대통령 조카 이형택씨는 유신시대 신탁은행 국제부에서 필자와 같이 근무했다. 그는 해외연수 발령이 나면 정보부에서 신원조회가 떨어지지 않아 언제나 포기했다. 필자는 학군단 선배인 그와 죽이 맞아 매일 저녁 소주 집에서 불만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그는 담백하고 구김이 없는 사람이다. 은행이 합병되면서 필자가 미국으로 떠나올 때, 그는 밤 비행기를 타는 내 손에 조용남의 ‘내 고향 충청도’ 레코드판을 쥐어주었다.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내가 부러운 듯한 눈으로.
그의 고모부가 대통령이 되던 해, 나는 카드를 보냈다. "5년 동안은, 이형 안 만납니다. 이형 찾아오는 사람들 경계하시오. 항상 끝을 조심해야 해요.”
얼마전 신문 1면에는 8개 부처 장관 교체 톱기사 보다 크게 그의 사진이 실렸다. 좋은 체격에 두터운 오버차림인 그의 얼굴은 알몸일 때보다 더 춥고 피곤해 보였다. 하필이면 보물 발굴이란 허구에 말려들어 이 겨울 알몸을 드러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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