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오페라의 ‘팔스타프(Falstaff)’ 개막 공연에 다녀왔다. 최근 LA 오페라 무대에서는 아시아계 성악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퀵클리 부인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효나와 팔스타프의 심복이자 친구인 바돌프 역의 테너 한윤통은 무대에 생생한 에너지를 더했다. 국적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국인처럼 자연스럽게 분장했고, 노래 실력은 물론 연기력까지 뛰어났다. 요즘은 오히려 이들의 성량과 연기력이 더욱 돋보여 객석에서도 괜히 덩달아 자부심이 느껴진다.
지휘로는 20년간 LA 오페라 음악감독을 맡았던 제임스 콘론이 올라 갈채를 받았다. 베르디가 80세에 작곡한 이 작품을, 80을 바라보며 현직에서 은퇴하는 지휘자가 선택했다는 점이 어쩐지 우연이 아닌 운명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콘론도 베르디처럼 인생 말년에 비로소 웃음의 의미를 이해한 것일까. 과연 그는 자신 있게 웃을 수 있었을까.
오페라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이자 완성된 유일한 희극 오페라이다. 베르디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에는 처절한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리골레토’에서 광대 리골레토는 딸 질다를 지키고 싶었지만 결국 잃고 만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만 결국 병으로 죽고, ‘일 트로바토레’에서 만리코는 사랑과 복수 속에서 처형당한다. ‘아이다’에서 아이다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고, ‘오텔로’에서 오텔로는 질투심에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스스로 파멸한다. ‘라 트라비아타’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초연부터 대성공이었다. 베르디는 명실공히 비극 오페라의 거장이다.
그런데 이 무대 위에서는 시종 웃음이 흐른다. 어리석음에 웃고, 통쾌해서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팔스타프라는 인물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에서 탄생한 캐릭터로,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허풍스럽고 욕심 많고 어리석지만, 이상하게도 인간적인 인물이다. 아니, 셰익스피어는 그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베르디는 그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고 이해했다.
베르디는 젊어서 아내와 두 자녀 등 가족을 모두 잃었고, 사회와 정치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극만 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희극 오페라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인간의 고통과 비극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희극 오페라다.
사실 그의 비극 작품들에는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의지가 되어주었던 오페라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가 있었다. 작품으로 만난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결국 베르디는 그녀와의 사랑을 택하고 결혼한다. 스트레포니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마음 한켠이 무너졌던 베르디의 삶을 지탱해 준 동반자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래서 어쩌면 베르디는 그녀를 통해 인간과 인생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예술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용기 있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했던 베르디는 인생 말년에 또 하나의 선택으로 유산을 남긴다. Casa di Riposo per Musicisti, 즉 음악가들을 위한 휴식의 집이다. 은퇴한 음악가들이 여전히 음악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그는 작품만 남긴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이 음악가로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베르디의 집’이라 불리는 이 양로원은 여전히 많은 은퇴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하고, 때로는 젊은 음악도들이 방문해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니, 베르디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술가다.
인간은 욕망과 경쟁, 그리고 서로를 향한 통제 속에서 살아간다. 이익을 위해 속이고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 쥐고 살아가더라도 결국 모두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팔스타프’의 웃음은 그래서 가볍지 않다. 그의 마지막 대사 “Tutto nel mondo e burla”(세상은 모두 장난이다)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을 조롱하는 웃음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한 뒤에야 지을 수 있는 웃음이다. 그 어리석음조차 예술로 승화시키고 이어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웃음거리가 되면 어떤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비웃는가. 그런 생각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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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