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사는 동안 내 또래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커뮤니티 칼리지나 일터에서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문학 단체 문우들은 대부분 연배가 높았기 때문이다. 자발적 고립을 즐기는 편이지만 학창 시절 친구들은 늘 그리운 존재다.
옛날 수첩 속 연락처는 장롱 면허 같은 것일 뿐. 한국에서도 이제는 집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갈아탄 지 오래이기에 연락할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는 유학이나 이민 등으로 헤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랬는데 팬데믹 기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고 졸업 후 캐나다로, 미국으로, 타향으로 흩어졌던 친구 중 한 명이 연락을 취해 왔다. 문득문득 그리워하다가 캐나다의 겨울이 혹독한 1월 어느 날 나의 이름 석 자를 검색하였던 거다. 내가 문학 활동을 하고 있던 것도 한몫했다. 문인협회로 연락해서 전화 연결이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가을 마침내 우리는 만났다. 연락이 닿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서 삼십여 년 만에 한국에서. 1학년과 2학년을 같은 반이었던 우리 입에선 만나자마자 “OO야~” “그랬제 저랬제”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당뇨 합병증으로 부은 얼굴, 주름진 얼굴, 피곤한 얼굴 같은 것은 여고 시절 모습을 떠올리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심하여 지은 이름에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 될 줄이야. 간혹 이름이 특이하다거나 예쁘단 말을 듣기는 했다. 컴퓨터 자판을 잘못 누르면 ‘열라’ 혹은 ‘영자’로 둔갑하는 적도 있지만 학창시절 통틀어 같은 이름을 가진 학우는 없었다. 그러니 SNS에서 친구 찾기를 한다면 찾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오늘,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세탁해서 가져갈 옷들을 한꺼번에 맡기고 나와서 일이 분쯤 걸어왔을 때였다. “혹시, 동래여고 졸업했어요?” 그린토피아 세탁소 여사장의 전화였다. 드라이클리닝 가격이 미국보다는 싼 편이기 때문에 한국에 올 때마다 동생네 단골 세탁소를 이용한다. 7년째 해마다 가을이면 부산에 와서 같은 가게를 들락거렸으므로 보기에 따라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늘 동생네 회원 번호로 세탁비 계산을 해왔는데, 오늘은 어쩌다가 내 이름과 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컴퓨터에 저장하도록 했다.
“네, 맞는데… 왜 그러…”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 조O란이야 조O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우리는 너무 놀라서 어이가 없어서 웃고 또 웃었다. 당시 학력고사를 마친 후 소개팅을 주선을 해 준 그녀를 종종 생각하곤 했는데 말이다. 그녀는 이과, 나는 문과.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던 우리에겐 선희 라는 친구가 있어서 뭉치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친하게 지냈었다. 스무 살 이후로 소식이 끊겨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같이 변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오늘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내내 예인이 고모로만 알고 지냈겠지. 알고 나서 둘 다 하는 말, 어쩐지 친근감이 들고 정이 가더라니!
이름 덕분에 수십 년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났다. 이 기쁨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
<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