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헨리 데이비스는 어느 날 거칠고 단단한 바위 위에 앉은 나비를 보고 상념에 빠졌다. 꽃 위에 앉은 나비가 아닌 바위 위 나비, 왜 나비는 바위를 택했을까. 바위를 꽃으로 만드는 힘이 나비에게 있을까, 시인은 그 소망을 직시하고 싶어 했다.
요즘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로 인해 변화되었던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있었을까를 생각한다. 작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셈치고는 별 흔적이 없는 것 같다.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아온 세월이 더 많은 듯하다. 원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생각보다 괴리가 크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월은 흘렀고 그렇게 상관없는 세월의 흐름은 실상 많은 변화를 내 생애 속에 새겨 넣었다. 때로는 현재의 내 자화상을 보며 그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울에 나타난 형체는 차마 소년과 청춘을 지났다고는 볼 수 없을 만치 녹슨 쇠붙이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녹슨 형체 속에 드리워있을 진정한 내 삶의 모습을 찾는 자아(自我)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도 나는 포기하기가 싫은 것이다.
무엇에 미련이 있어 아직도 “찾음”을 끊어내지 못할까. 다들 물러서라는데도 왜 나비는 바위위에 앉아 있는 것일까. 정녕 바위를 꽃으로 바꿀 힘이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일까.
영국문화원에서 비영어권의 많은 나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단어를 물었는데 정열(passion) 사랑(love) 스마일(smile)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단어들을 보며 내가 앉은 바위가 어느새 너무나 완고함을 깨달았다.
내 자아를 찾노라 애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풍성했던 정열, 그렇게 많았던 사랑, 윤활유와 같은 스마일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분노, 고집, 무심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쉽게 보지 않는가.
일단 녹을 닦아내고 거기에 정열을 입혀야 한다. 무엇이든 열심을 내보는 것이다. 더하여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다. 시대는 젊어졌다고 말한다. 젊음의 특권 중 하나가 사랑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할까? 여기서 노쇠의 벽 앞에 선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말고는 사랑의 대상이 없다. 오래전 들은 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있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의 진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남자는 목숨을 다 해 사랑한다, 믿어 달라, 말했다.
여자는 그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남자는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날렸다. 사랑을 증명했으나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 조금은 섬뜩한 얘기지만 청춘은 그렇게 사랑을 갈망한다.
이제 나는 그런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리석음을 잘 알기 때문에. 지금은 소리 내 웃지도 않는다. 웃을 일이 행방불명이기 때문에. 사랑도 스마일도 지명수배 할 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안에 도사린 이런 것들, 정열, 사랑, 스마일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고뇌하는 것이다.
벌이나 나비는 1파운드 꿀을 얻기 위해 5만 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한다는 통계가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가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바쁜 삶을 사는 나비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은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피곤해서였을 것이다. 시인은 나비가 바위를 꽃으로 바꾸지 않을까 우매한 기대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대를 하고 싶다. 이미 해는 지고 붉은 노을이 서산을 물들이는 즈음이지만 바위가 변해 꽃이 되는 꿈을 꾸고 싶다. 마음껏 웃고 싶다. 더 뜨겁게 인생을 사랑하고 싶다.
요즘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소식은 별로 듣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을 떠났다는 이의 소식만 들린다. 확실한 수치는 알지 못하지만 스산한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자주 가는 짐(gym)에서 꾸준히 걷고 자전거를 타는 주름 가득한 황혼들을 보면, 바위 위에 앉은 나비를 보는 듯하다. 그것은 분명 안간힘을 쓰며 낙조(落照)를 뿌리치는 한 폭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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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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