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1

1977년 6월22일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열린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그 오른쪽 옆이 안홍균 씨다. 왼쪽은 처음 김형욱의 개인 통역을 맡았던 뉴욕의 김재현 변호사, 그 뒷줄에 김형욱의 아들도 보인다.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70년대만 해도 한국의 외교력이나 수준이 형편없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밝혀졌지만 미 의원들이나 언론인 등을 한국에 데려가서 기생 파티 열어 오입시켜주고, 양복도 맞춰주고, 박사학위 남발하고… 그걸 외교라 생각했어요. 로비한다고 그런 건데 정도가 아닌 잘못된 로비였지요. 그게 바로 ‘코리아 게이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40년 만에 입을 열었다. 1970년대 중후반 한국과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사건 당시 미 하원 윤리위 전문위원 겸 통역으로 격동의 역사에 발을 깊숙이 담갔던 안홍균 씨(85, 버지니아 거주)다.
안 씨는 의회 청문회에 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물론 메릴랜드 한인 김한조 씨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이른바 ‘백설작전’에 관계된 주미대사관 KCIA 요원 김상근, 그리고 중정의 뉴욕 분실장이었던 손호영의 통역을 맡아 숨 막히는 한미 정치 드라마의 현장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인물이다. 더군다나 미 의회 전문위원으로 위촉돼 박동선 등 코리아 게이트 관련자들의 조사에도 관여해 누구보다 그 전후 내막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닉슨 독트린에 이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자극 받은 박정희 정부가 다급한 나머지 비합법적, 비윤리적 방법에 경도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물론 사건의 발단이 된 책임은 박동선 씨에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는 “박동선 씨가 73년 12월8일 알래스카 공항에서 통관수속을 밟다 세관원들에게 로비한 의원 명단과 헌금액이 적혀 있는 메모지를 빼앗긴 겁니다. 박씨가 메모지를 뺏기지 않으려고 입에 넣어 삼키려 했지만 일부가 남아 증거가 된 겁니다. 연방 의원의 1/4인 80여명이 미국의 원조를 받는 한국 돈을 받은 꼴이 되니 미국 언론과 여론이 들끓은 거지요.”
안 씨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의 주역인 로비스트 박동선 씨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담대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박동선은 영어도 능통하고 미 의회와 의원들의 생리를 꿰뚫고 있어 청문회장에서도 꿀리지 않고 당당했다”며 “미 의원들도 줄곧 미스터 박이라 호칭하는 등 존경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 의원들은 박동선 씨가 조지타운 클럽으로 불러주면 ‘아, 나도 이제 인정받았구나’ 할 정도로 박 씨의 영향력은 컸다”면서 “박씨는 그만큼 능력도 있는데다 평소 자기 이미지를 철저하게 빌드업 했다”고 덧붙였다.
안홍균 씨는 1977년 6월 22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레이저위원회 증언대에 선 데 대해서는 ‘김의 오판’이라고 분석했다.
“김형욱이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이뤄진 청문회에 나온 걸 두고 논란이 많았는데 저는 김형욱이 오판했다고 봅니다. 당시만 해도 그 사람은 한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속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증언 내용을 보면 한국에 협조적인 표현이 많았어요. 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민감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말소리가 작아졌습니다. 한국에 센서티브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안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한국 기자들이 ‘크게 말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지요. 한국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된 상황에서 김의 증언은 미 언론에 이용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대로 되지 않은 거지요.”
불법 로비로 인해 비화된 코리아 게이트의 후유증은 컸다. 미 여론의 공세는 거셌고 한국은 쩔쩔 매야 했다. 한미관계는 수년 동안 최악의 갈등을 빚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안홍균 씨는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란 한마디로 코리아 게이트를 정리했다.
“박동선 사건은 여러 증거가 가짜임이 밝혀지고 의회 최종 보고서에서 밝힌 것처럼 미완성 종결됐지요. 처음 박동선 사건을 터트린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에서 사과문을 쓸 정도였어요. 자기들이 너무 심했다는 거지요.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결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난 게 바로 코리아 게이트의 실체입니다.”
■ 안홍균 씨는 누구
로비스트·FBI 정보분석가로 활동
코리아게이트때 의회 조사위에 속해
1932년 9월 충주 생으로 어려서 서울로 이사해 성장했다. 혜화국민학교를 마치고 경기중학교(현 경기고) 6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자 처음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했다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해 임관한 후 8년 군 생활 끝에 대위로 제대했다.
1959년 도미해 위스콘신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조지워싱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다녔다.
코리아 게이트 당시인 1977년 10월-79년 1월 미 하원 윤리위 특별조사위원회 전문위원 겸 통역으로 위촉돼 활동했으며 그 후 워싱턴의 로비회사인 암스트롱 버드 정보산업회사에서 근무했다. 1987년 신상옥 감독과 영화배우 최은희 씨의 방미 기자회견 때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신 감독이 할리우드에 설립한 영화회사에 1년 반 몸을 담기도 했다.
1993년부터 2012년까지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정보 분석가로 일하다 80세에 은퇴해 현재는 버지니아 애난데일 자택에 거주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 청문회 자료집.
■ ‘코리아 게이트’는 어떤 사건인가
박정희 정권, 미국서 불법 로비
코리아게이트(Korea gate)는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워싱턴에서 조지타운클럽을 운영했던 박동선 씨를 통해 미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며 불법 로비를 한 사건이다.
1975년 미 의회에서는 한국 정부가 미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활동들이 폭로되기 시작하였다.
1976년 10월24일 워싱턴포스트가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 정부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으로 90여 명의 미국 정치인에 대해 매수공작을 했다”고 특종 보도하면서 코리아 게이트는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미국 내에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 상황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을 보이자 한국 정부가 박동선에게 미국산 쌀 수입에 관한 이권을 주는 대신에 그 자금으로 미 정치인들을 회유·매수하려던 시도였다는 것이다.
박씨의 불법 로비 사실이 밝혀지자 한·미 관계는 사상 최악의 길로 치달았다.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 위원회)가 조직돼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김한조 사건으로 망명한 주미대사관의 중앙정보부원인 김상근, 중정의 뉴욕 분실장으로 역시 망명한 손호영 등이 청문회장에 서야 했다.
상하원은 윤리위원회 청문회를 열어 1978년 박동선을 소환했고 사면을 대가로 증언대에 선 그는 32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약 85만 달러를 선거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털어놓았다. 청문회는 박씨로부터 돈을 받은 일부 의원만 징계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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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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