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앨리스아일랜드 상 수상한 임마철씨
동대문상가서 15년이상 사업하다 45세때 도미
사업가로 성공후 수십년간 할렘 불우이웃 도와
랭글의원, 7월17일 ‘임마철의 날’로 선포
그는 전북의 두메산골 출신이다. 가정 형편이 힘들어 14세에 상경 숱한 고생을 했다. 고학과 만학으로 배움의 기초를 다졌다. 4.19 혁명 땐 시위대에 참여했다. 40대 중반에 미국에 왔다. 뉴욕에선 산전수전을 겪으며 사업에 성공했다.
줄곧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인이자 한인으로 그리고 미국시민으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가 지난 13일 이민자로서 각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시민권자들에게 수여하는 ‘앨리스 아일랜드’ 상을 받은 이유다. 주인공은 바로 임마철(80)씨.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민자에게 주는 최고의 상
그는 1937년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온 것은 1982년. 45세의 나이 때이다. 산골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사업에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어야 했다.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에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과 개척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미국 시민으로 정착도 했다. 사업으로 얻은 이윤창출은 허투루 쓰지 않았다. 한인사회와 고국 고향에 장학 사업을 해왔다. 소수 민족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끊임없이 지원하고 있다.
그가 맨하탄 할렘의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일을 해온지도 어느 덧 수십 년이다. 뉴욕의 친한파 의원인 찰스 랭글 연방하원의원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6년 7월17일을 ‘임마철의 날’로 선포했다. ‘앨리스 아일랜드 상’ 수상자로 추천도 했다. 그가 앨리스아일랜드 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였던 셈이다.
그는 “앨리스아일랜드 상이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줄 몰랐다. 막상 그렇게 훌륭한 상을 수상하고 보니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더욱 바람직한 미국 시민으로서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봉사에도 더욱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겠다”고 수상소감을 말한다.
■남다른 조국사랑
그는 전북 깡촌(?)에서 6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형제들도 잃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14세에 상경했다. 서울에선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서울대경상고를 4.19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졸업했다. 또래보다 몇 년 늦은 셈이다. 리더십이 탁월해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졸업직후라 4.19 혁명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몰라 할 수도 없었다. 4.19 혁명에 기백과 정의감으로 직접 참여했던 이유다.
당시 그는 시위대와 함께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시위대를 목격하면서 경회루 담장을 넘어 피신했다. 시위대가 종로 5가를 지날 때 반도병원에 입원했던 부상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수건을 흔들며 격려해주던 모습도 뚜렷이 기억난다고 회상한다.
그는 조국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4.19부터 시작됐다고 여긴다. 지난 2010년엔 플러싱에서 4.19 혁명 50주년 기념식을 주최했다. 동국대 학생회장 출신인 배시영씨와 서울대 출신인 한경수 씨가 힘을 보탰다. 뜻을 같이하는 200여 명의 동지들도 함께 참석했다.
그는 “비록 몸은 이역만리에 있지만 57년 전 목숨을 걸고 달렸던 혁명의 발걸음이 이제는 조국의 민주화로 꽃피운 모습에 늘 감격스러워 한다. 뉴욕에서 4.19 혁명 기념식이 일시적인 행사로 그친 것이 언제나 가슴 아프게 남는다”고 말한다.
그는 뉴욕에 와서도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하다. 조국 통일운동의 역군노릇도 했다. 민주평통 상임위원만도 3차례 역임했다. 그런 공로로 한국의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그에게 남다른 조국사랑은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한인상가 이전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동대문상가에서 15년 이상 의류부자재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러다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가 도미한 이유다. 물론 자녀교육도 한몫했다.
뉴욕에 첫 도착해 플러싱 161가에 집을 먼저 마련했다. 35년 동안 살고 있는 그 집이다. 첫 사업은 주말마다. 롱아일랜드 루즈벨트 플리마켓(Flea)에서 크고 작은 가방을 판매했다. 1년 후 플러싱 144가 ‘가고파’ 식품점을 인수했다. 2년 지내 개성에 안 맞아 접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대문상가 사업경험을 살려 맨하탄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처음엔 커스텀 쥬얼리 도매상을 차렸다. 가게를 옮겨선 머리장신구를 취급했다. 각종 머리장신구 유행을 선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중국의 저가공세로 인해 아이템을 여성패션모자로 바꾸었다. 현재까지 약 30년 동안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템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부지런함, 신뢰와 정직을 잃지 않았다. 좋은 상품 개발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직원하고는 가족처럼 지낸다. 지속적 불황에도 순탄하게 사업을 발전시켜 온 이유다. 그는 현재 사업에서 한 발 물러섰다. 자녀들에게 대물림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1987년 10대 윤수균 회장의 추천으로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사장도 역임했다. 가장 기억 남는 일은 뉴욕시로부터 브로드웨이 한인상가를 코리아타운으로 공식 지정 받고 시의회가 정식 인준해준 것이다. 막강했던 브로드웨이 한인상가가 날로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회원 대부분 떠난 것은 아쉬움이다.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시도한 한인상가 이전이 실패한 적이 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회원들이 비록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있지만 뭉치면 살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지속적으로 한인상가 이전에 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고 당부한다.
■두 모습의 한국 정치인은 이제 그만
그는 1983년 인권문제연구소 뉴욕지회 활동을 시작했다. 평소 김대중 총재를 존경했고 마침 망명시기에 심재선, 이종인, 민승연 등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인연을 맺게 된 것.
그는 2년 임기의 지회장을 2번 연임했다. 큰 업적은 DJP 연합정권 성사다.
당시 DJP 단일화를 추진하던 비전 21 회장으로서 김대중 후원회, 김종필 후원회, 박철언 후원회 등은 연합시키는데 장정수씨와 함께 성사시킨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일후보를 내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일로 꼽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경호를 담당했던 설정남, 김광성, 강태성, 조성택 등이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며 아직도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인권문제연구소 뉴욕지회 활동이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으로 해체되어 더 이상 존속하지는 않지만 옛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예전의 추억을 나누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여야의 국회의원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이 미국에 왔을 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를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인물로 평가한다.
그는 한국정치인들 중에는 예전에 함께 했던 시절은 까맣게 잊고 고마움은커녕 오히려 모르는 척 하거나 피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정치인 중이지만 의리는 없고 야망가나 모사꾼에 불과한 인물들도 있다며 불쾌함을 표하기도 한다.
■가화만사성
그는 5.16 혁명 이후 뒤늦게 군에 입대했다. 마산 군의학교를 졸업하고 30 예비사단 의무중대위생병으로 근무했다. 이어 카추샤에 발탁되어 2년 동안 더 복무했다. 제대 1개월 전에는 친구이자 처삼촌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소개 받았다. 5개월여 연애를 하다 복스러운 외모와 좋은 성격에 반해 1964년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 후 53년 동안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슬하에 2녀1남을 두고 있다. 50년 넘게 자신이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아내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기교를 부리려 하지 않고 항상 정직하고 정석대로 살려고 한다. 사업의 모토도 정직과 신뢰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귄다. 공사구분이 뚜렷하고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한 성격 탓이다. 그의 건강비결은 남을 칭찬하며 물 흘러가듯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80 평생 그의 좌우명은 ‘가화만사성’이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형통하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가정의 행복은 삶의 최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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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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