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제35대 뉴욕한인회장 선거관리위원회 이세목 선관위원장
그는 뉴욕한인운송협회 회장 출신이다. 뉴욕한인청과협회장도 역임했다. 자신이 축적한 경험을 회원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다.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남북통일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장으로 활동한 이유다. 그는 제30대 뉴욕한인회장직도 성실하게 수행했다.
한인사회의 미래를 위해 애쓰라는 동포들의 간절한 열망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은 ‘봉사정신’이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큰 단체에서 활동하면 그만큼 봉사의 범위도 큰 것이라 여겼던 셈이다. 그는 전직 한인회장으로 제35대 뉴욕한인회장 선거를 위한 선거관리위원장도 맡았다. 한인회장 선거 파행으로 분열됐던 한인사회에 ‘공정한 선거문화 정착’을 통해 화합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한인단체에서 수장으로 활동했던 이세목 전직회장이다.
■역사 인물을 닮고 싶었던 소년
그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남5녀 중 여동생을 둔 여섯째. 아버지는 ‘고려피혁’을 운영하던 사업가. 어린 시절은 부유한 환경에서 보냈다.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놀았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개구쟁이였다. 전철이 지나가는 철로에 못을 놓고 그 것으로 장난감을 만들었다. 번데기 장사가 ‘뻔’하면 ‘데기, 데기’를 외치며 쫓아 다녔다. 하드 통을 갖고 다니며 ‘아이스 께끼 사려!’를 외치던 아저씨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복개공사가 한창이던 청계천에 빠질 정도로 참으로 짓궂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학창시절은 인천에서 보냈다. 동대문 초등학교 1학년 때 시험보고 인천교대부속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사춘기 때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더 좋았다. 송도중학교를 다닐 때는 핸드볼 선수를 했다. 태권도를 배워 검은 띠도 땄다.
탁월한 운동신경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자랑한다.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때는 밴드부로 활동했다. 그 때 색소폰을 배웠다. 당시는 악기가 너무 비싸 악기보호를 위해 싸움요령(?)을 배워야 했다. 타 학교학생들과 싸움이 잦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공부보다 친구가 더 좋았지만 역사 과목을 무척 좋아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었다. 그 역시 역사 과목의 영향이다. 세종대왕, 이순신 등 역사 속 영웅들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트 인생
그는 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전기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외식 산업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군 복무는 경기도 부천 3군 사령부에서 했다. 행도를 맡아 연대장 상장을 받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회상한다. 제대 후에는 전기기사로 1년 동안 사우디에 파견돼 미국건설회사에서 일했다.
견디기 쉽지 않은 건설 현장이었지만 젊은 혈기로 버틸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친구와 동업으로 부천에 작은 전기공사 회사를 차렸다.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던 때라 2년 동안 잘 운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업하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회사 수익금 모두를 챙겨 도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꿈을 찾아 뉴욕으로 도미한 이유다.
그는 1981년 추수감사절 전날 뉴욕에 도착했다. 롱아일랜드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누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하지만 도착부터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추수감사절 준비로 너무 바빠서 공항 마중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도 못 쉬고 다음날부터 누님 슈퍼마켓에 나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3년 정도 일하다가 슈퍼마켓 운영이 점점 어려워져 1984년 독립, 플러싱 루즈벨트 애비뉴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첫 취직은 헌츠포인트 청과물도매시장 트럭운전사. ‘트럭을 운전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고 얻은 직장이었다.
그만큼 직장이 절실하던 때였다. ‘이걸 해야 먹고 산다’는 각오로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덕분에 자메이카의 야채가게를 인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경험부족으로 지인에게 가게를 그냥 넘겨줘야 했다. 그렇게 또 다른 실패를 경험해야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다시 시장 트럭운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번 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신장에 돌이 생겨 수술을 받고 몇 개월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고는 시장 트럭회사의 물건구입 바이어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2년6개월 정도 성실히 일한 뒤 퀸즈에 또 다시 야채가게를 차렸다. 그마저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야말로 비즈니스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성실한 직장생활로 마련한 비즈니스는 늘 헛된 결과가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는 좌절도 포기도 하지 않았다. 늘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1991년 트럭 2대를 구입 ‘LEE 77 Trucking'이란 운송업을 시작해 트럭을 15대까지 늘려가며 실패를 딛고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그동안 내 삶은 롤러코스트 인생처럼 파란만장하다. 좋고 나쁜 환경변화가 너무 심했다. 하지만 잦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귀띔한다.
■봉사하는 삶
그는 뉴욕한인운송협회에 참여하면서 한인사회 활동에 나섰다. 1993년 운송협회 부이사장으로 시작, 2년 임기의 이사장도 두 차례 했다. 2000년에는 회장을 맡았다. 운송협회와 청과협회가 통합해 새롭게 출범한 청과협회의 첫 번째 회장이었다. 그가 직능단체 회장을 맡은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회원들에게 협회가 있음으로써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협회를 위해 봉사하는 길이라고 여긴 셈이다.
회장 임기동안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 보다 자발적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협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이유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 회장을 맡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동포사회 발전과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 역시 ‘감투’가 아닌 ‘봉사’라 생각한 것이다.
뉴욕한인회장에 출마한 계기도 바로 ‘봉사’다. 큰 단체를 맡아 활동하면 그만큼 봉사할 기회와 범위도 넓어진다는 신념에서다. 그동안 어떤 단체든 봉사하기 위해 출마했고 회장 임기동안 최선을 다해 봉사한 만큼 한인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던 그 자체가 그에겐 자부심이자 보람인 셈이다.
그는 늘 봉사정신이 몸에 배어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아내인 이미선씨와 두 딸인 수진, 수인양도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 왔다. 가족들 모두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방문해 한인노인들에게 한국음식 접대를 했다. 한인노인 무료 중식을 거드는 자원봉사 활동도 펼쳤다. 아버지의 봉사정신이 가족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족의 삶도 바로 봉사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행복은 가족사랑
그는 뉴욕한인회장은 임기동안 활동할 수 있는 재정과 영어구사 능력이 필수적이지만 자기희생을 할 수 있고 욕심 부리지 않는 ‘봉사정신’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한인회를 올바로 이끌려면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인들에게 믿음을 주고 믿음을 받는 한인회장이 한인회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인회장 선거의 법정소송에 관한 예방책은 법보다는 도덕심이라 여기는 그는 아무리 서약을 해도 소용이 없는 현실을 볼 때 출마자들이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세와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전직회장 공금유용에 관해서는 최소 사과는 기본이고 잘못했으면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뉴욕한인회장 선거는 직선제가 바람직하다는 그는 “가능한 많은 한인들이 참여하는 직선제가 대표성을 가질 수 있다, 간접선거는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새롭게 시도해보는 것을 말리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한인회는 한인들의 참여와 관심을 보여야 발전할 수 있다는 그는 한인회가 뭐를 줄 수 있느냐보다는 한인들이 한인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뢰를 주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온화하고 꼼꼼한 성격이지만 강직한 외유내강 스타일이다. 1985년 선배의 소개로 유학생을 만나 연애를 하면서 외모와 지적 매력에 빠져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그는 아내와 두 딸인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사는 가족 사랑이 바로 행복이라고 한다. 그가 이젠 한인사회 활동보다는 그동안 못한 가족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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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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