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퀸 연아’피겨의 불모지 한국에서 혜성 같이 등장해 세계 피겨 역사의 신화를 써내려온 그는 이제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았다. 한국 피겨가 낳은 자타공인 최고의 스타 김연아는 6세 때 스케이트에 입문한 뒤 18년간 한국 피겨를 넘어 세계 피겨의 역사를 바꾼 진정한 여왕이었다.
■혜성처럼 등장
1996년 처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김연아는 피겨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 혜성처럼 나타난 기대주였다.
김연아는 여섯 살 때 우연히 동네 스케이트장에 들렀다가 어머니 박미희씨의 권유로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이를 그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표현했다. 이후 초등학교 2학년 때 나가노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미국)을 보고 올림픽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고, 각종 주니어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천재성을 드러냈다.
어린 김연아는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며 빙상장을 떠나지 않았고 부상이 그의 앞을 막았을 때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역경을 이겨냈다.
■시니어 무대 평정
김연아가 시니어 무대에 나서기 시작한 2006~2007시즌부터는 한국 피겨 역사에 연일 새로운 페이지가 추가됐다. 김연아는 천재성에 머물지 않고 온몸에 멍이 드는 것을 마다 않는 끊임없는 훈련으로 자신의 주무기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점프 콤비네이션 등 완벽한 점프를 완성했다.
또 예술성을 높이기 위해 고난도 회전력과 허리의 유연성, 허벅지의 힘을 요구하는 T자형 카멜 스핀은 ‘유나 스핀’(Yuna Spin)을 탄생시켰다.
■세계를 매혹시키고 진정한 챔피언으로 우뚝
그리고 자신이 선수로서 목표로 세웠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는 절정의 기량을 뽐내며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확한 기술과 팔색조 같은 매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며 종합 점수 228.56점이라는 역대 최고 기록으로 정상에 올라 한국 피겨에 첫 메달을 안겼다.
김연아는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로 그랑프리 파이널·세계선수권대회·올림픽 등 피겨 3대 메이저대회 우승을 모두 석권,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이때 아직까지도 김연아가 세운 점수는 깨지지 않고 있다.
마지막 무대가 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의 빛나는 은반 위에서, 김연아는 후회 없는 연기를 펼치고도 아쉽게 올림픽 2연패는 이룰 수 없었다.
■스포츠 외교관 꿈 향해
‘선수’로서의 마지막 무대를 내려온 김연아는 ‘스포츠 외교관’이라는 새로움 꿈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 밴쿠버 올림픽 후 1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김연아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라는 새로운 꿈을 위해 빙판으로 돌아왔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과정을 돕는 과정에서 스포츠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소치 동계올림픽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해 IOC 선수위원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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