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겨웠다던 장마의 끝자락쯤에 모국을 방문했다.
도착 후 남쪽으로 내려간 비와 태풍 주의보로 첫 여행지 한려수도 해상 국립공원을 포기해 잠깐 속이 상했지만, 폭우로 재난을 당한 분들을 생각하며 곧 마음을 돌렸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여행길을 강원도로 바꿨다. 대학시절 자정에 떠난 밤기차를 타고 12시간 이상 걸려 경포대로 놀러간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강원도는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몇 년 전 새로 개통된 늘씬한 고속도로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2시간 반이면 도착하니 참 세월 좋아졌다.
친구가 회원권을 가진 홍천의 D 콘도에서 머물렀는데, 그 화려함과 편리한 시설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비싸다는 콘도에 들끓는 수많은 휴가객이 좀 낯선 고국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고국에는 기본적 생계유지가 안 되는 사람이 많다는데, 자유 시장 경제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단면을 보는 듯 나의 마음은 그리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홍천 근처에는 용문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때 나라를 잃은 설움에 마의태자가 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고도 하고, 땅에 꽂은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자랐다고도 하는 1100년 이상 되는 은행나무가 훤칠한 키를 자랑한다. 이 은행나무는 나라의 위기 때마다 소리를 내 알렸다는 전설이 있다. 용문사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고 차가운 물이 흘러가는 인공 개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제 노년기로 접어드는 친구 부인들은 바짓가랑이를 접고 그 맑은 개울물을 걸으며 어린 아이들처럼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이튿날은 강릉, 경포대를 지나 주문진을 거쳐 돌아왔는데, 손 뻗치면 닿을 듯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 생선 횟집에서 모처럼 싱싱한 생선회를 즐겼다. 그러나 음식보다는 이곳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고국 특유의 물씬 풍기는 바닷가 정취를 더 즐긴 것 같다.
지금도 눈감으면 그 수많은 음식점의 간판이 눈에 어른거린다. 국적도 이름도 생소한 여러 음식을 맛보았는데, 끊임없이 들여오는 각종 음식에 기가 질린다. 그 분량도 음식값도 엄청난데, 언제부터 시작된 음식문화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많은 낭비로 마음이 불편했다. 좋은 음식을 애써 대접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값싸고 편한 서민들의 대중 음식점이 가장 좋다.
고국에 가면 종로 5가에 있는 ‘한국 교회 백주년 기념관’에 많이 머무는데,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있고, 바로 옆에 연동교회 새벽 예배에 참석을 할 수 있어 좋다. 또한 아침 일찍 걸어나가 동대문 시장의 먹거리 골목에서 아침을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맛도 있고 값도 싸지만, 시장에서는 마음속에 새겨진 고국의 모습이 물씬나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참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루 아침은 ‘나주 식당’이라는 곳을 첫 손님으로 들어가자 우리 부부를 반기며 그 전날 아침에 우리를 보았다고 한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어제 아침 두 분이 그 앞을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노라고 말했다. 그 식당은 어머니가 시작했는데 한자리에서 34년이나 되어 방송까지 나간 유명한 곳이라 했다. 식사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오려는데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좀 더 놀다가라고 붙잡는다.
아내는 청국장 찌개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다고 하니 그 청국장은 고향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보내는데 상품으로 파는 것을 미국에서 온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며 막무가내로 주려했다. 여행 중 보관하기가 어려워 간곡하게 사양했는데, 참 사소한 일 같지만 나는 어머니 품속같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사람의 이러한 만남이 참 귀하고 아름답게 생각된다.
이 미국 땅에서는 여간해서는 맛보기 힘든, 인간냄새가 풀풀 풍기는, 허술한 것 같고 손해도 때론 보겠지만, 고국에는 인간과 인간과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질그릇같이 소박한, 모든 것을 품는 흙같은 정취가 남아 있어서 나는 고국을 더욱 마음에 품고 그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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