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진을 한 장 소개하려 한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진들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 폴라로이드로 찍은 건데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 자세한 상황은 기억이 없다. 한국서 고2(11학년) 때였던 1974년에 이민와서 10학년부터 다시 다녔는데, 이 사진은 11학년 때인 1976년 봄, 당시 다니던 알렉산드리아의 티시윌리암스 고등학교 풋볼 경기장 관람석에서 찍었다.
사진에 나타난 그대로 그 당시 나의 머리칼은 상당히 길었다. 히피시대의 마지막 열차를 탄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그 당시 한국 고교생들처럼 짧은 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길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머리칼을 그렇게 길게 자라도록 놔둔 피치 못한 이유가 있었다. 74년도 내가 살던 곳 가까이엔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가 없었다. 그래서 이발을 하려면 미국 이발소에 갈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내 영어실력으로는 도저히 머리를 어떤 스타일로 깎아 달라고 주문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모자란 영어 때문에 창피함을 당할 수 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발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 멀지 않은 곳에 한국 이발관이 생겼지만 그 때는 이미 긴 머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머리칼이 계속 자라도록 놔두었던 것이다.
미국에 이민 와서 고등학교를 3년간 다니면서 영어에 미숙했어도 학교에서는 크게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비록 영어실력은 원어민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수학이나 과학과목들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기에 급우들로부터 전혀 무시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여러 가지 상들도 받으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고등학교 때와 달리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들에서도 나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영어가 자신 없었기에 클래스에서 손을 들고 질문 한번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물론 과제로 주어진 페이퍼를 작성해 내는 것도 보통 어려움이 아니었다. 제출한 페이퍼에 교수님이 빨간 펜으로 적어주시는 여러 가지의 지적사항 등을 대할 때의 창피함이란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심한 한국어 악센트와 엉성한 발음, 그리고 자주 틀리는 문장구조로 인해 급우들과의 대화도 조심스러웠다. 급기야는 내가 다니던 학교보다는 한국 학생들이 많이 다니고 있던 근처의 다른 학교에 가서 한국 친구들을 사귀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로 진학해서도 이어졌다. 로스쿨 수업은 대부분의 경우 ‘소크라테스 수업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교수님이 지적해 불려 세움을 받은 채로 진행되는 거의 취조식의 질의응답을 할 때면 식은땀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흐르고 하반신 전체가 마비되는 느낌을 받는 수모를 겪곤 하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있었구나 하고 웃어넘길 수도 있을 만큼 세월도 흐르고 마음의 여유도 갖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아니 매 수업시간이 두려워 수업에 들어가기가 싫어질 정도로 심각했었다.
영어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힘이 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늦은 나이에 이민 오거나 유학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더욱 그러하다. 활달한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 영어 때문에 사람을 기피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매사에 소극적으로 성격마저 변해가는 학생들도 많다. 우리 모두가 세심하게 배려하고 격려해줌을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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